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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웅치전투 순국선열들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전북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147에 건립되어 있다.
 창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웅치전투 순국선열들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전북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147에 건립되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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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彰烈祠)

이곳은 임진왜란 때 호남을 지켜냄으로써 나라를 지켜낸 전투로 평가되는 웅치(雄峙) 전적지의 한복판이다.

당시 왜군은 조선 전역을 거의 장악한 뒤 호남 공략을 위해 금산에서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용담, 진안을 거쳐 전주성을 공략하고자 했다.

이를 막고자 1592년 8월 13-14일 이틀간 전주 의병장 황박(黃璞),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김제군수 정담(鄭湛),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과 함께 진안 출신 창의사 김수(金粹)와 그 동생 김정(金精) 등의 의병이 연합하여 이곳 웅치에서 죽기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와 중과부적으로 김제군수 정담과 김수, 김정 등을 포함하여 상당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왜군은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전주 안덕원까지 진출하였으나 이곳 웅치전에서 막대한 전력의 손실을 입었기에 전주성을 제대로 공략도 못해보고 패주하고 말았다. 이에 웅치전은 곡창 호남을 지켜내고 국가를 지켜낸 사실상 대첩(大捷)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이곳 덕봉마을에서는 웅치전에서 순국하신 영령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420여 년간 면면히 추모제를 모셔왔다. 진안군은 그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2012년 창렬사를 건립하고 매년 8월 13일에 (사)웅치전적지보존회 주관으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높이 기리고자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사) 웅치 전적지 보존회"

 
웅치전적지보존회가 '제1방어 진지' 표지판을 웅치 전적지 1.7km, 창렬사 470m 지점에 세워 두었다. 이곳은 황박 의병장이 주둔했던 곳이다.
 웅치전적지보존회가 '제1방어 진지' 표지판을 웅치 전적지 1.7km, 창렬사 470m 지점에 세워 두었다. 이곳은 황박 의병장이 주둔했던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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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전북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147 '창렬사' 외삼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전문이다. 창렬사는 1592년 8월 13~14일 이틀 동안 1만여 침략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한 1천여 아군의 영령들을 추모하고 현창하기 위해 건립된 제향 공간이다. 그래서 외삼문에 모충문(慕忠門), 사당에 창렬사(彰烈祠) 현판이 걸려 있다.

안내판의 "이곳은 임진왜란 때 호남을 지켜냄으로써 나라를 지켜낸 전투로 평가되는 웅치 전적지의 한복판이다"라는 첫 문단은 1592년 8월 13~14일 당시 웅치 전투가 창렬사로 들어가는 계곡 입구, 이곳 창렬사 주위, 창렬사 뒤편 고개 정상부까지 세 곳에서 전개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왜군은 조선 전역을 거의 장악한 뒤 호남 공략을 위해 금산에서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용담, 진안을 거쳐 전주성을 공략하고자 했다"라는 둘째 문단은 일본군의 침략 경로와 목적을 말해준다. 

전라도 곡창지대를 빼앗기면 안 되는 까닭

왜적은 전라도 곡창지대를 빼앗아 배불리 먹으면서 여유롭게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심산이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1592년 8월 13~14일 이틀간 전주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과 함께 진안 출신 창의사 김수와 그 동생 김정 등의 의병이 연합하여 이곳 웅치에서 죽기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와 중과부적으로 김제군수 정담과 김수, 김정 등을 포함하여 상당수 장렬히 전사"하였던 것이다.

웅치를 넘은 일본군은 이제 활개를 치며 전주성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적은 "웅치전에서 막대한 전력의 손실을 입었기에 전주성을 제대로 공략도 못해보고 패주하고 말았다. 이에 웅치전은 곡창 호남을 지켜내고 국가를 지켜낸 사실상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상 대첩"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일본군은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빌미가 되어 전주 공성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웅치전투에서 순국한 1천여 영령들의 희생이 전주성 함락을 막아내는 핵심 밑거름이 된 것이다. 비록 웅치에서는 목숨을 바치고도 졌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므로 "사실상"은 "대첩"으로 평가받을 만하다는 표현이다.
 
웅치전투 마지막 혈전이 벌어졌던 웅치 정상부. 이정표에 "웅치 전적비 1.7km, 두목마을 1.2km"라고 안내되어 있다. 전적비가 정적지 아닌 곳에 세워져 있다는 설명이다. 놀라운 일이다.
 웅치전투 마지막 혈전이 벌어졌던 웅치 정상부. 이정표에 "웅치 전적비 1.7km, 두목마을 1.2km"라고 안내되어 있다. 전적비가 정적지 아닌 곳에 세워져 있다는 설명이다. 놀라운 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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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약 10년 전에 이어 웅치 전적지를 두 번째로 찾은 지난 20일 필자는 속된 말로 '놀라서 자빠질 지경'에 빠졌다.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147(창렬사)에서 출발해 "웅치 전적지" 안내판까지 1.3km를 올랐는데, 안내판에 "→1.7km 웅치 전적비"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방문한 '웅치 전적지'와, 2023년 3월 20일 찾은 '웅치 전적지'가 다른 곳이라는 말인가? 전라북도 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던 종래의 '웅치 전적지'와, 2022년 12월 30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웅치 전적지'가 전혀 딴 위치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제대로 고증도 않고 마구 세워버린 웅치 전적비

알고보니, 기존의 웅치전적비는 1960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전국 곳곳에 벌인 역사유적 '정화' 사업의 결과물이었다. 1963년 동학농민전쟁을 기념해 최초로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그 정화사업의 대표 사례이다.

전라북도는 군사정권의 명령에 따라 1969년 웅치 전적비를 세웠다. 보고에 급급한 나머지 확실한 고증도 없이 실제 전투장소에서 1.7km 떨어진 산등성에 전적비를 건립했던 것이다.
 
엉뚱한 곳에 세워져 50년 이상 국민들의 참배를 받아온 '웅치 전적비'.
 엉뚱한 곳에 세워져 50년 이상 국민들의 참배를 받아온 '웅치 전적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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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을 좀 더 분명하게 알아보기 위해 문화재청 누리집을 찾아본다. 또 놀랍다. 종전의 전라북도 기념물 지정이 2022년 12월 30일 해제되고 창렬사 일원이 사적으로 새롭게 승격 지정된 때가 2022년 12월 30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문화재청 누리집은 "사적, 임진왜란 웅치 전적"에 관한 해설을 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 설명> 칸이 "문화재 설명 준비 중입니다"로 비워져 있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 문화재청 설명
 '임진왜란 웅치 전적' 문화재청 설명
ⓒ 문화재청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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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엉뚱한 곳을 웅치 전적지(전북 기념물)로 지정한 뒤 54년 만에 다른 곳을 국가 사적으로 바꿔 승격시켰으면, 그렇게 한 까닭을 밝히면서 <문화재 해설>을 신속히 게재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더욱 중요한 것은, 지난 54년 동안 역사유적 분야 전문가들은 무엇을 한 것일까?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라지만, 정녕 세상은 넓고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참고로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의 해당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웅치, 이치, 금산에서의 전투에 의하여 일본군은 열기가 꺾여 전라도 침입을 단념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전라도는 전화를 면하게 되었다." "1592년 8, 9월 중에 전개된 공방전에서 가장 큰 성과는 전라도에 쳐들어 온 일본군을 격퇴하여 곡창 호남 지방을 지킨 일이었다. 이치 전투와 거의 동시에 진안의 웅치에서는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이 합세하여 사력을 다해 전투를 하였다."

태그:#웅치전적, #창렬사, #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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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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