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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을 했던 사람이 '인쇄인들을 위하고 시민들에게 인쇄문화를 알리기 위한' 서울인쇄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용역으로 공공 기관을 운영하면서 공간을 꾸리는 일, 시민들을 대하는 순간들을 소소하게 일지 형식으로 담아내고자 합니다. [기자말]
충무로 인쇄 골목에 대한 오해가 하나 있다.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기에는 불친절하고 불편하다는 얘기다. 한편으론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대부분 인쇄소가 대량 물량을 수주해야 유지되기에, 소량 인쇄에는 적극 대응하지 못하기도 하고, 기술인과 디자이너의 관점과 언어가 사뭇 다른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무로에는 일반 시민과 인쇄인들 사이에서 길 안내자이자 통역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기획사'라고 부르는 이들인데, 이들은 고객이 디자인을 가져오면 종이를 고르는 일부터 찍고, 자르는 모든 생산 공정을 연계하고 중간 단계의 품질을 감리하며 완성품을 만들어 낸다. 오늘 만난 오수훈 대표(프린트라임)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단가 경쟁? 디자인 역량으로 극복한다
 
그의 인쇄소 한쪽에 마련된 다양한 종이 견본을 설명하고 있다. 시제품 제작은 고객의 디자인에 걸맞은 종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 프린트라임 오수훈 대표 그의 인쇄소 한쪽에 마련된 다양한 종이 견본을 설명하고 있다. 시제품 제작은 고객의 디자인에 걸맞은 종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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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쇄 공정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실제 공정을 맡길 믿음직한 인쇄소와 소통이 원활해야 한다. 또 기술과 디자인의 접면에서 일하는 이로써 기술의 언어와 디자인의 언어를 함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오수훈 대표는 인테리어 전공자다.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우연찮은 계기로 인쇄업계로 발을 딛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그는 대학에서 디자인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색다른 이력을 강점으로 꼽고 있다.

"처음에 창업할 때 단가 경쟁을 많이 하던 시기였어요. '자본도 부족하고 그거는 절대 못 따라간다.'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면 우리 경쟁력은 뭘까? 고객은 최소한 자기가 소중하게 디자인한 것들을 결과를 그대로 100% 재현을 하고 싶으신 게 가장 핵심이에요. 이런 거를 100% 가까이 구현해드리는 게, 디자이너의 니즈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정말 우리의 경쟁력이구나 생각했어요."

오수훈 대표는 이 답을 얻기까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인쇄소 직원으로서 5년을 지내며, '인쇄는 하청 작업이기에 창의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작업'이라는 선입견, 그래서 공을 들여도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어려운 관행들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오수훈 대표의 표현대로 '5년의 수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이 주력할 경쟁력과 방향을 정하고 창업하게 되었다고 한다.

컨설팅인지, 교육인지
 
크리에이터 워크숍은 창작자에게 인쇄 제품 제작을 위한 컨설팅을 진행하는 수업으로, 오수훈 대표는 이 수업에서 강사를 맡아 청년 창작자들을 도왔다.
▲ 2022년 크리에이터 워크숍 중인 오수훈 대표 크리에이터 워크숍은 창작자에게 인쇄 제품 제작을 위한 컨설팅을 진행하는 수업으로, 오수훈 대표는 이 수업에서 강사를 맡아 청년 창작자들을 도왔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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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의 아이디어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하더라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늘 선택과 타협의 연속이다. 기본적으로 시간과 비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성비의 지름길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고객 중엔 인쇄에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많아, 오히려 마치 인쇄 수업인 양 인쇄 과정에 대한 이론과 설명을 함께 제시한다고 한다.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거든요. 인쇄는 생산 환경과 디자인에 따라 순발력 있게 응용하는 게 핵심이잖아요. 원리 이해가 안 되면 응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리를 가르쳐 드리면 되레 필요했다고 말씀들을 많이 하세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단순히 인쇄된 결과물로 가지고 논의하다 보니까 그 과정이 많이 생략돼 있어요."

오수훈 대표는 현재 서울인쇄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크리에이터 워크숍의 강사를 겸하고 있다. 크리에이터 워크숍은 아이디어를 가진 참여자들에게 기술 컨설팅을 통해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실현하도록 돕는 워크숍이다. 그의 인쇄사에서 하던 일을 본격적으로 강의실로 가져온 셈인데, 말 그대로 '분초를 쪼개' 일해야 유지되는 인쇄소 대표로서 창작자들을 돕는 이유를 물었다.

"디자인하시는 분들이 인쇄에 대한 기본 원리를 잘 모르시더라고요. 인쇄 분야 취업을 위한 과정도 있긴 한데, 또 그분들은 디자인을 잘 모르시다 보니까 연계가 실제로는 될 수가 없어요. 디자인과 기술의 간극이 아직도 저는 크다고 봅니다. 크리에이터 워크숍은 그거를 정말 많이 좁혀줄 수 있는 좋은 교육 과정이라고 봅니다."

자체 생산 시스템을 이용한 서비스 개선까지

과거 많은 '기획사'들이 생산 설비를 갖추지 않았던 데 비해 오수훈 대표는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다. 소량 인쇄 물량을 자체 소화하고 발 빠른 시제품 제작으로 개발 주기를 단축한다는 장점이 있는데,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자체 설비를 이용해 기존 생산 시스템이 갖고 있던 난제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가령 디자이너가 의도한 색과 최종 인쇄된 색을 일치시키는 '색 관리'의 문제는 인쇄업계의 숙원이나 감리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오수훈 대표는 자체 보유한 인쇄기로 색 견본책를 만들어 일정 부분 이 문제를 해소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이 견본책을 기준으로 작업한다면 최소한 오수훈 대표의 인쇄소에서 제작하는 인쇄물들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대로 색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대량 유통 시장과 별개로 대면 서비스 시장 가능성 있어

디자이너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컨설팅하는 그의 방식은 언뜻 생각하면 트랜드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템플릿을 통해 수요자가 직접 편집부터 주문까지 진행되는 소위 '웹 to 프린트' 시대에 대면을 통해 상담하고, 원리까지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고, 자잘한 요구사항을 세세히 다루는 것은 지속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일까?

"(온라인 편집, 주문 방식은) 그런 시장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가상공간에서 내 사진에 옷을 입혀보고 옷을 구입하고 그런 서비스도 있잖아요. 수요가 많은 시장이라면 그렇게 할 만해요. 그러나 저희처럼 정말 100% 면담을 해야 하는 일들은 그것대로 필요하죠. 저는 시장이 다르다고 보는 거예요."

장인의 설 자리 제시한 인쇄인
 
오수훈 대표가 보유하고 있는 디지털 인쇄기로 다양한 종이에 인쇄한 색견본이다. 디자이너들이 의도한 색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종이에 표현되는지를 알려준다. (프린트라임 블로그에서 갈무리)
▲ 프린트라임의 색 견본책 오수훈 대표가 보유하고 있는 디지털 인쇄기로 다양한 종이에 인쇄한 색견본이다. 디자이너들이 의도한 색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종이에 표현되는지를 알려준다. (프린트라임 블로그에서 갈무리)
ⓒ 프린트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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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인쇄업의 불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다른 시장'에 대한 확신에 찬 이야기가 반가웠다. 그의 '다른 시장'은 기존 인쇄업과 그리 멀지 않은 영역이라 더욱 그렇다.

사실 이제껏 많은 인쇄인들이 인쇄물의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아끼지 않아 왔다. 충무로가 인쇄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장인'들 때문이다. 다만 무리한 단가 경쟁, 온라인 플랫폼 등이 가속화되면서 더 이상 '공을 들이지 못하는 구조'가 만연해지고 있던 중이다.

이제 10년 차 인쇄인인 오수훈 대표는 충무로 인쇄 골목에 다시 '장인'이 설자리에 대한 해답을 찾은 듯하다. 산업적으로 그의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성을 갖고 있는지, 불황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많은 인쇄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지는 기자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지만, 40대의 젊은 장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인쇄업의 미래에 기대를 갖게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같은 글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태그:#서울인쇄센터, #프린트라임, #오수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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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네트워크(사) 대표. 문화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지역 현장에 들어가 지역 이름을 걸고 시민대학을 만드는 'OO(땡땡)은대학' 프로그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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