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심하지만 반전인생을 살고 있는 혹은 반전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편집자말]
"그 몸으로 테니스를 친다고?"

내가 테니스를 배운 지 두세 달쯤 됐을 때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다. 상체가 부실한 내 몸에 테니스는 무리일 것 같다고 했다. 상체에 근육이 좀 있어야 라켓도 휙휙 돌리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런가. 그냥 그렇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말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한 이 말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테니스가 잘 되지 않을 때마다(사실 거의 매번 그렇다) 이때다! 하고 뿅! 나타난다. 그럼 난 순식간에 의기소침해진다.

몸치니까, 몸치라서... 아니었다
 
힘있게 서브를 넣지 못해 반 이상은 공이 네트에 걸린다.
▲ 테니스 서브 연습  힘있게 서브를 넣지 못해 반 이상은 공이 네트에 걸린다.
ⓒ 김지은

관련사진보기

 
지난 테니스 레슨 시간에는 힘이 너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공이 날아오면 바로 허리를 돌리고 테이크 백(볼을 치기 위해 라켓을 뒤로 빼는 동작)을 한 후 라켓을 던진다는 느낌으로 공을 쳐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아 공이 힘 있게 나가지 않는다. 누구나 칠 수 있는 아주 느린 공이 네트 건너 편으로 날아간다. 그 순간 친구가 한 말이 또 생각난다.

'네 몸은 테니스 칠 체형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아…….'

난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제가 테니스 칠 체형이 아니라서 공이 잘 안 나가는 거죠? 상체가 약하잖아요."

난 선생님이 상체 근육을 키우라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다.

"체구가 작은 초등학생도 힘 있게 치는 아이가 많아요. 자기 몸을 어떻게 써야 힘이 걸리는지 아는 거예요. 자세를 더 낮춰보기도 하고 허리를 이렇게 저렇게 돌려보고 스윙을 더 크게 하기도 하면서 방법을 찾은 거죠."

텅.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난 힘이 없어. 힘이 없으니 이 운동은 할 수 없지. 이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PT를 받아 상체 근육을 키우는 방법뿐이야. 하지만 PT 받을 돈이 어디있어. 테니스를 그만두는 수밖에.'

항상 이런 논리 속을 헤매던 나에게 선생님의 말씀은 명쾌했다. 내 체형에서도 가능하다.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보고 시도해 보며 내 몸에 맞춘 최선의 동작을 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다.

운동할 때 나의 정체성은 몸치이다. 운동이 잘 되지 않거나 늘지 않는 상황을 무척이나 당연하게 여긴다. 잘 안 될 때 조금 시도해 보다가 쉽게 포기한다. 흡사 포기할 준비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생각은 '포기'라는 결정으로 수렴된다.

운동을 그만 두기 전에 여러 자세를 시도해 봤어야 했다. '취미인데 그렇게 까지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나의 운동을 익히고 평생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못할 이유는 또 뭔가.

늘고 있다니까... 포기는 없어

지난주 일요일 동네 테니스 코트장에서 남편과 테니스를 쳤다. 이 코트는 거의 일 년 만이다. 몸을 조금 풀고 남편과 랠리를 한다. 남편은 정식 서브를 하지 않고 내가 쉽게 칠 수 있게 공을 넘겨준다. 흡사 '그래, 내가 너랑 쳐준다'란 느낌으로.
 
내 실력과 별개로 예전만큼 테니스 코트가 넓어보이지는 않는다.
▲ 엄청 넓어보였던 테니스 코트장 내 실력과 별개로 예전만큼 테니스 코트가 넓어보이지는 않는다.
ⓒ 김지은

관련사진보기

 
처음에는 느린 공도 받아치기가 어렵더니 30분쯤 지나자 몸이 풀렸는지 공이 라켓에 맞기 시작했다. 공이 네트를 왔다 갔다 하는 횟수가 는다. 공이 땅에 한 번 튄 후에 바로 쳐야 하는데 정식 게임이 아니니 공이 땅에 두세 번 튀어도 포기하지 않고 공을 라켓으로 떠 넘긴다.

레슨 시간에 배운 좋은 자세를 다 잊고 공을 쳐내기 바쁘다. 그런데 어떤 한 순간, 공이 조금 천천히 나에게 온다고 느껴질 때, 친구가 말한 문장이 아닌 선생님이 나에게 해주신 문장들이 떠오른다.

"공에 너무 달려들지 말아요."
"팔을 쭉 뻗어서 스윙하세요."
"공이 바운드되기 전에 발을 멈추세요."


이런 말들. 그럼 난 그 말이 내 몸에 스밀 수 있게 자세를 가다듬는다. 비록 열 번에 한 번, 스무 번에 한 번이지만. 그렇게 치다가 순간, 신기한 걸 깨달았다.

1년 전 이곳에서 테니스를 칠 때는 코트가 너무 넓어 보였다. 내가 친 공은 번번이 네트에 걸려 넘어가질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코트가 넓어 보이지 않는다. 내 공이 다 네트를 넘긴 건 아니지만 혹여 네트에 걸렸더라도 테니스 코트가 넓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 것이다.

'오, 내가 실력이 늘었다는 것인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 오랜만에 가면 크다고 생각했던 놀이터나 공터가 생각보다 작아 깜짝 놀란다. 한번 작아보이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커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테니스 코트, 넌 끝이야. 넌 내게 다시 커보일 수 없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먼저 말해주지 않아 내가 스스로 말했다.

"나 늘었지? 그치?"
"응, 늘었네."
"다른 사람에 비해 천천히 느는 것일뿐 몸치라고 아예 안 느는 건 아니야."


남편은 내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주어진 상황을 탓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게 뭐든.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소심하지만 반전인생을 살고 있는 혹은 반전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태그:#테니스 코트 , #테린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