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바빌론> 데미안 셔젤 작품세계의 집대성이자 동시에 앞으로의 가이드라인이 될 영화다. 셔젤의 전작들은 각기 다른 장르의 영화로 동일한 테마를 변주해왔다. 꿈을 향한 도전 과정에서의 딜레마다. <위플래쉬>는 최고의 드럼연주자가 되기 위해 인성을 포기했고 <라라랜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운명적인 사랑을 보냈으며 <퍼스트맨>은 첫 번째 달착륙을 위해 가족과 멀어졌다.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지만 외로움 속에 남는다. <바빌론>은 여기에 광기, 방황, 두려움을 연료 삼아 '품위'에 대한 탐구로 뻗어나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할리우드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1920년대 중반이다. 배우에게 목소리가 허락됐다는 사실은 놀라운 기술적 변화이기도 했지만, 영화가 추구하는 품위의 좌표가 재설정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무성영화는 신비로움을 간직한 마법적인 세상이었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표정과 화면의 연출을 보며 각자의 대사를 상상했다. 배우의 목소리가 화면에 덧입혀지자 상상의 여백은 줄어들고 직설적이며 현실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두 번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되는 각각의 영화제작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무성영화 촬영장은 주먹구구식 진행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야만적 공간이다. 주인공은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그러나 대사 없는 무성영화에서는 짧은 순간이나마 신성하기까지 한 영화적 찰나를 포착한다. 반면 유성영화 촬영장은 정해진 동선 아래 잡음 하나 없이 영화를 만든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도입됐고 기술적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어쩐지 무성영화 시절의 신성함보다는 공장처럼 인간적 노동의 가치가 짙게 배어버린 모습이다.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바벨탑을 쌓는 두 사람
 

신의 권위에 도전하러 바빌론의 탑을 쌓았던 성서 속 사람들처럼 희미해지는 영화의 품격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이 할리우드의 격변기에 등장한다.

잭 콘래드(브래드 피드)는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이지만 끝없이 메시지의 혁신, 진보적인 연출을 외치며 산업의 발전을 추구한다. 물론 그의 메시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8번에 달하는 결혼과 이혼, 밤마다 파티에서 만취하는 난잡한 사생활로도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미디어에 대한 그의 자부심만큼은 진짜다.
 
'개와 배우는 출입금지'였던 시대에 배우의 위상을 바꾸고 영화의 왕이라 불리는 콘래드는 누가 뭐래도 가장 신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유성영화가 도입되자 그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한다. 관객들은 진지한 연기를 보고도 웃음을 터트리고 골라서 보던 시나리오 제의도 끊긴다. 영화사 고위직들은 연락을 피하고 언제나 호의적으로 기사를 써주던 기자까지 그를 조롱하는 기사를 내보낸다.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겠다는 그가 오히려 휩쓸리게 된 것이다.
 
화가 난 콘래드는 기자를 찾아 자신의 문제가 뭐냐고 따져 묻지만, 다음 기사를 타이핑하던 기자는 차분하게 말한다. 당신의 추락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그냥 시대가 변했을 뿐이며 우리의 명이 다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런 대화는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될 거라고. 그러나 필름에 담긴 그의 전성기 모습은 관객들에게 영혼이나 천사처럼 영원히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음을 감사하라고. 담담하게 기자의 방에서 돌아 나온 콘래드는 스스로 신이 되기를 포기하고 또 다른 영생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생각하면 바로 눈물이 난다는 비참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무능력한 허풍쟁이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딸도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넬리는 신이 된 게 아니라 신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첫 촬영임에도 단번에 세트의 분위기를 휘어잡고 감독의 요구에 따라 3초 만에 눈물을 흘리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기 말을 증명한다. 누구보다 독하고 영악하게 행동하며 스타로 급부상하는 그녀의 입성기는 성장을 위한 여정이 아니라 자기가 당연히 있어야 할 위치로 돌아가는 귀로에 가깝다.
 
무성영화가 이어졌다면 충분히 통했을 재능이지만 시대는 그녀를 신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째지고 걸걸한 목소리, 상류층과는 다른 말투를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었다. 성공의 문턱에서 고꾸라진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그저 그런 영화에서 소모되고 말 섹시 아이콘으로 남아 마모되거나, 과거에 잠시 반짝인 영광을 뒤로한 채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자기를 규정지을 수 없게 만들 거라며 거침없이 세상과 치받던 넬리도 결국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영화 <바빌론> 스틸컷 ⓒ 영화 <바빌론> 스틸컷

 
 
할리우드 영화의 또 다른 미래
 

멕시코에서 가족과 국경을 넘어온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 영화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코끼리 분뇨에 파묻히면서도 영화적 삶이라는 목표를 잊지 않는다. 처음 만난 넬리가 묻던 영화적인 삶은 의미 있는 일, 영원히 남는 일. 그것이 바로 매니가 쌓는 바벨탑이다. 매니는 우연히 인연을 맺은 잭의 도움과 라이징스타로 발돋움하던 넬리에 대한 동경으로 차곡차곡 탑을 쌓아 드디어 영원히 의미 있는 일을 구상해 볼 만한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세 명의 주인공 중에서 유일하게 현재에 휩쓸리지 않고 미래를 보는 건 매니 뿐이다. 다만 그가 조심스레 걷던 길은 바벨탑의 꼭대기로 이어져 신이 되는 게 아니라 할리우드의 구멍으로 추락하는 길이었뿐. 갱스터 맥케이(토비 맥과이어)는 매니를 'LA의 구멍'으로 초대한다. 멕케이는 차세대 스타가 기다리는 장소라고 말했지만 그곳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휘발성의 눈요기로만 가득한, 영화가 타락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였다.
 
자의 반 타의 반 15년간 영화계를 떠난 매니가 LA로 돌아와 보는 영화는 <사랑은 비를 타고>였다. 무성영화 시절 최고의 여배우였던 리나의 우스꽝스러운 목소리가 처음 들리고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에 매니는 오열한다.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일하던 시기에 동료들과 극복해야 했던 혼란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듯이. 이미 그 순간에는 자신에게 길을 터줬고 콘래드도 없고, 동경의 대상이자 사랑이었던 넬리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한참을 오열한 뒤 매니는 영화의 또 다른 미래를 본다. 최초의 활동사진 <말 타는 기수>를 시작으로 최초의 영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넘어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 그리고 수많은 명작을 지나 3D의 새로운 장을 연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까지. 매니가 떠났어도 할리우드는 그렇게 미련하고 난잡하게 바벨탑을 쌓아왔다. 벽돌이 아니라 필름으로 한단 한 단 높아지는 그 탑 안에서 인간들은 꿈을 꾼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서 더 아름다운, 영원히 기억될 무언가를 위해.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영화 바빌론 데미안셔젤 브래드피트 마고로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nd in the end. The love you take is equal to the love you mak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