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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화'나 '자율'이란 단어는 '경직'이나 '타율'에 비해 충분히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유연화, 누구의 자율인지 따져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외쳐온 노동 유연화 정책, 노동부의 발표들,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문에는 일제히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노동시간을 '자율적으로' 늘렸다 줄였다 하고 싶은 기업의 요구가 담겨 있다.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이 있지만, 이전 정부로부터 그동안 수많은 예외를 두어 장시간 노동을 허용했다. 특별하지 않은 특별연장근로가 그렇고, 30인 미만 사업장 주 60시간 노동 허용이 그렇다. 그런가 하면 지난 10여년간 초단시간 노동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는 그들의 노동 개혁에는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의 '자율적인' 결정권은 없다. 연장근로 관리를 주 단위에서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늘리고,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통해 자본이 더 마음껏, 자율적으로 노동시간을 결정하도록 돕고자 할 뿐이다.

예외를 표준으로, 장시간 노동 터주는 정부

지난 정부는 1주 연장근로시간을 12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의 '보완 대책'으로 근로기준법 시행규칙의 특별연장근로제에서 인가받을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의 범위를 확대했다. '통상적이지 않은 업무량 폭증'과 '단기간 내 미처리 시 사업에 중대한 지장·손해를 일으키는 경우' 등을 추가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더해 해외 파견 건설업, 조선업을 포함한 전체 제조업에 특별연장근로 기간을 180일로 확대하기도 했다. 추가 업무가 90일, 혹은 180일 이상 필요한 상황이라면 인력을 충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인력 충원 없이 기존 노동자들에게 과로를 권한다.

지난해 10월 SPC 계열사 SPL 공장에서 야간 근무 중이던 여성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다. 주야맞교대를 하는 이 사업장은 연장 근로까지 하며 공장을 가동했다. 2022년에는 특별연장근로까지 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SPL지회 강규형 지회장은 "노동조합(한국노총) 동의 후 개별 노동자 서명을 받아서 특별연장근로를 했지만, 노동자 개인이 거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노사 자율'의 민낯이다. 여전히 야간 노동이 빈번한 사업장은 이곳만은 아니다. 야간 노동 제한은 없고, 특별연장근로 가능 업종을 더 열어주며 그 시간까지 확대하는 것이 정말 노동개혁일까?
 
3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주60시간 연장근로 일몰을 연장하려는 정부와 여당의 시도에 대해, 작년 12월 26일 민주노총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3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주60시간 연장근로 일몰을 연장하려는 정부와 여당의 시도에 대해, 작년 12월 26일 민주노총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 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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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부는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주 60시간까지 노동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동안 이들 사업장에서는 '예외적'으로 주52시간에 8시간을 추가해 60시간까지 허용되었다. 지난해 12월 말 일몰될 예정이었던 해당 사항에 대해 기획재정부, 노동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한데 모여 일몰 기간을 연장해달라 '대국민 호소'를 했다. 연장법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정부는 2023년 1년간 계도기간을 부여해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존재하는 법을 노동부가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목표로 필요한 감독을 지금까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 1년을 부여하면 계도가 되나? 1년이 지나더라도 또 다른 계도기간 연장을 하는 것은 아닌가? 명확히 확인한 것은, 윤석열 정부의 '개혁'은 자본과 기업의 '개혁'이며, 노동자 건강의 자리는 없다는 점이다.

IT업계에 노사 자율로 들쑥날쑥한 노동시간을?

많은 드라마에서 IT업계 노동자들은 밤새 일을 한 뒤 피곤한 얼굴로 등장한다. 이것이 결코 웃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들쑥날쑥한 노동시간, 예상하기 어려운 시간에 하는 노동은 건강에 특히 악영향을 끼친다. 2016년 게임업계 노동자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한 이후, 게임을 포함한 IT업계의 과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랐다. 게임 출시를 앞두고 일정 기간 밤새워 일하는 '크런치 모드'는 이미 유명하다.

하지만 IT업계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는 여저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김종진 유니온센터 이사장은 성남지역 IT 노동자 실태조사를 인용하여1), "IT 사업장의 고강도·집중 노동으로 지칭되는 크런치 모드가 51%나 되었고, 크런치 모드 평균 일수는 34일(2달 이상 18.3%, 3달 이상 13.5%)"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IT 사업장 10곳 중 4곳(38.7%)에서는 아직도 포괄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IT 노동자들 역시 이런 갈아 넣는 노동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는 IT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제시했다.2) 설문에 따르면 "현행 52시간인 법정 최대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응답이 70% 이상이었으며,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법정 최대 근로시간의 제한을 풀고 1달의 초과 근로시간을 1주에 몰아서 사용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해서는 건강을 해칠 수 있으므로 반대한다는 응답이 90% 이상"이었다. 초과 노동을 인정하지 않고 장시간 노동을 유도하는 포괄임금제에 대한 규탄도 높아 "95% 이상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정부도 포괄임금제 폐지를 얘기는 하지만, 근로감독을 하겠다는 말뿐이다. 지난해 12월 12일 미래노동시장위원회 권고안 발표 이후 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가 촉구한, "크런치 모드의 전 산업 확대 시도를 중단"하라는 내용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이미 과로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적정 노동시간 일할 수 있도록 규제하는 것이 노사 자율의 문제로 내던지는 것보다 시급히 할 일이다.

초단시간으로 쪼개는 일자리의 위험

장시간 노동만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짧은 노동시간 역시 노동자들의 삶과 건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4주 평균 1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노동자에게는 주휴일, 연차유급휴가, 퇴직금 등이 보장되지 않는다. 기간제법상 기간 제한 규정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 방과 후 예술 강사,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방문노동자 등에서 초단시간 노동하는 경우가 최근 급증했다.

이들 초단시간 노동자는 급여 및 복리후생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이에 투잡 등 여러 일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과로에 시달리는 문제도 발생한다. 한 곳에서 짧게 일하기 때문에 휴가나 휴일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해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들 초단시간 노동자는 코로나19 유행 기간 급증해 2022년에는 180만명에 달했다.

최근 울산시 동구청은 '최소생활노동시간보장'을 도입해 구청에 고용된 53명의 초단시간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주 15시간으로 만들고 이들에게 주휴수당, 연차수당, 4대 보험, 퇴직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불평등을 해소하고, 불안정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바꾸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3) 정부가 할 일은 공공 영역에서부터 초단시간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가능한 시간 동안 일하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계속 개발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포함하는 것이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

'노동자에게' 적정한 노동시간을

정부는 마치 미래 노동 시장에서는 노사가 자율로 노동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자율이라는 말은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 고용이 불안정한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사업주가 원하는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정부가 말하는 대로 노동조합 유무가 노동조건에 영향을 끼친다면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 노동자들도 적정 노동시간과 적절한 임금 수준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 정부가 무력화하려고 시도하는 노동시간 제한 규정들, 초단시간으로 쪼개기를 불러일으키는 차별적 조항 폐지, 법적 근거도 없는 포괄임금제 단속 등이 그것이다.

1) "유연근무제 확대 등 윤석열 정부 노동시간 정책의 문제점과 대응과제", 김종진, <윤석열 정부 노동시간 제도개편의 실체와 문제점, 정책대안은 무엇인가?>, 2022.12.8.
2) "IT산업의 장시간 노동 실태", 오세윤 민주노총 화섬노조 IT위원회 위원장,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 대응 토론회>, 2022.7.13.
3) "노동존중! 진보행정! 울산 동구청의 모색", 방석수 동구청 비서실장. <최소생활 노동시간 보장제 도입을 위한 토론회>, 2022.12.14.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유청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노동시간, #윤석열_노동정책, #유연근무제, #장시간_노동, #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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