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작가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연대해 온 미술가입니다. 정 작가와 여러 예술가들은 '폐공장 청소 퍼포먼스' 등을 비롯해 많은 예술 작품으로 해당 투쟁과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기록해왔습니다.[편집자말]
보고싶은 재춘 아저씨. 

아저씨와의 마지막 식사는 종로 한 귀퉁이 허름한 24시간 무인라면가게에서였죠.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 순회상영회의 일환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재춘언니>를 상영한 날이었어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투쟁 이후 위태롭게 비계를 오르며 무거운 철근을 옮기고 있는 아저씨의 일상을 봤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어요.

더욱이 그날 아저씨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부랴부랴 상영회에 참석해서인지 무척 피곤해 보였어요. 코로나 방역관리로 식당이 문을 닫아 겨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많이 죄송했어요. 그 날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죠.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 순회상영회 다큐 영화<재춘언니>관람 후 재춘 아저씨와 이수정 감독,  목우작가와 함께.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 순회상영회 다큐 영화<재춘언니>관람 후 재춘 아저씨와 이수정 감독, 목우작가와 함께. ⓒ 정윤희

 
2012년 초, 가난하고 외롭던 시절, 재춘 아저씨는 작업실 차리겠다고 콜트악기 빈 공장으로 찾아온 저와 진경언니에게 애지중지 키운 딸들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따뜻하고 정 깊은 밥상을 차려주셨죠. 아마 아저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빈 공장에서 그리고 농성 천막에서, 희망식당에서 아저씨가 차려준 밥을 먹었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독립영화 <휴가>의 주인공 재복이 밥을 차려주는 첫 장면에서 '아! 재춘 아저씨다! 알아차린 사람이 많았었죠.  

그러나 저는 정작 아저씨에게 따뜻한 밥 한끼 제대로 대접한 적이 없어요. <재춘언니>가 극장에 개봉했을 당시 보러 오라고 연락 주셨을 때도 전 "예술가들도 사는 게  힘들다고, 예술인권리운동을 해야 하니까 나중에 보자"고 했죠. 지금에 와서 너무 후회돼요. 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저씨의 소중한 두 따님과 가족 친지들과 함께 아저씨를 장지에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버렸어요.

제겐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는 동지 이전에 애틋한 가족 같았거든요. 그래서 직함이나 동지라는 호칭 대신 친근하게 '아저씨'라고 부르게 된 것 같아요. 혼자 있을 때 불안하고 나약했던 저는 덕분에 함께 밥을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용기의 씨앗을 틔울 수 있었어요.

"자본 권력이 한 사람의 인생 파괴하는 게 그렇게 쉬울 줄은..."
 
 (좌) 콜트악기 공장 부엌에서 까혼 연습에 매진 중인 아저씨. 2012, (우) 공장이 사라진 후 공장 앞 천막 농성장에서 공연 연습 중. 2013

(좌) 콜트악기 공장 부엌에서 까혼 연습에 매진 중인 아저씨. 2012, (우) 공장이 사라진 후 공장 앞 천막 농성장에서 공연 연습 중. 2013 ⓒ 정윤희

 
우리는 2013년 2월, 콜텍 박영호 회장의 모략으로 공장에서 쫓겨났었죠. 당시 건물주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는 공장을 부수고 정수장 건너편에 있던 그 자리에 은폐 의혹이 농후한 가스충전소를 세웠어요. 결국 그 해 11월, 가스충전소를 허가한 부평구청 공무원이 수천만원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리고 확인해 본바 그 가스충전소 부지의 주인은 다시 박영호 회장의 친척에서 박영호 회장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기나긴 콜트콜텍 투쟁 속에서 자본가, 정치인, 공무원, 깡패, 관리인, 알바 용역 등이 모종의 먹이사슬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죠. 

2018년 5월,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은 2012년 "미래에 다가올 경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법 논리로 파기환송했던 대법원 재판이 박근혜 정부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재판거래 의혹 중 하나라고 발표했었죠.

양승태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을 받아내려고, 2009년 고법에서 정리해고 무효소송 항소심 판결 부당해고를 인정했음에도 이 부당해고를 한순간에 '정당한 것'으로 뒤집어 버렸죠. 결국 그 판결은 2014년 재상고 기각으로 확정되었어요. 그로 인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이 기약 없이 거리에서 지난한 투쟁의 시간을 버틸 수밖에 없었지요.  

회사의 이익을 위해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은 장기간 단식, 고공농성, 일인시위 등등 안 해 본 게 없었죠. 재춘 아저씨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경봉아저씨는 길바닥에서 환갑을 지내야 했죠. 콜트악기가 출연한다는 세계 유수의 박람회에 가서 회사가 저지른 만행을 알리기도 했었죠. 노래를 짓고 부르고 시를 짓고 연극도 했습니다. 영화에도 출연하고 책도 냈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지만, 점점 건강도 예전과 같지 않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녹록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자본 권력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보다 불합리한 세상이 어디 있는지 개탄스러워요.
 
 (좌) 전진경 드로잉 작 <천막_03>, (우) 윤희 드로잉 <재춘아저씨 2016>

(좌) 전진경 드로잉 작 <천막_03>, (우) 윤희 드로잉 <재춘아저씨 2016> ⓒ 전진경, 정윤희

 
단 한 번도 문을 열어주지 않던 콜트악기 본사 앞에서 '끝장투쟁'을 하던 아저씨는 2019년 2월 18일 부지불식간에 박영호 회장을 만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었죠. 회사에서는 회장이 없다고 발뺌했었지만 박영호 회장은 그 자리에 있었죠. 2007년 정리해고 이후 13년 만에 만났다고 하셨었죠. 그리고 콜트콜텍 투쟁 4423일이 되던 날 단식을 시작하셨죠. 50대 후반의 나이에 극한의 상황을 버티며 42일 단식으로 콜트콜텍 투쟁 4464일을 끝으로 부당해고에 맞선 13년의 콜텍투쟁을 명예복직으로 이끌어내셨죠. 그때 시와 일기를 쓰고 피켓시위를 하며 점점 여의어 가던 아저씨의 모습은 우리들의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있어요.

지난 십여 년 동안 저와 동료들은 예술의 방식으로 함께해 왔었죠. 공장이 무너진 후 전진경 작가는 농성 천막에서 '드로잉데이'를 매주 열었고 치명타 작가가 함께했죠. 아저씨의 말은 이들 작업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어요. 저도 가끔씩 그림을 그렸죠. 콜밴 봉고차, 농성 천막을 꾸몄었죠. 문화연대는 긴 시간 수요문화제를 열었고 투쟁기금을 모으는 콘서트를 열었죠. 인천 활동가들의 '야단법석'은 고요한 빈 공장을 축제의 장소로 만들었어요. 김성균, 이수정, 이란희 영화 감독들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투쟁과 삶을 기억하도록 남겨주었죠. 

아저씨, 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우리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투쟁으로 꼭 기억해야 하는 것. 아저씨가 하늘로 돌아가신 후 아저씨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어요. 그래서 페이스북에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친구들' 그룹에 아저씨를 추모하는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에게 재춘 아저씨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업의 기록 사진을 요청했어요.

언젠가 여력이 조금 생기면 문화 운동의 한 획을 그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을 연구하고 싶어요. 기타를 만드는 장인이었지만 정작 기타연주를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해고 이후 작사 작곡까지 해내는 연대기는 엄청 감동적이죠. 특히 재춘 아저씨의 역작 <서초동 점집>은 정말 명곡이에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 알려줘 고맙습니다"
 
 (좌) 치명타 드로잉 <임재춘 말씀> 2017, (우) 임재춘 조합원 단식 농성 천막 그림들.

(좌) 치명타 드로잉 <임재춘 말씀> 2017, (우) 임재춘 조합원 단식 농성 천막 그림들. ⓒ 치명타, 전진경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은 예술인들의 창작에 영감을 주고, 예술을 통해 투쟁한 것 같아요. 투쟁이 끝난 이후 기타와 까혼 연주를 들을 수 없어서 더 확신이 갔죠. 아저씨에겐 수많은 예술가, 영화감독, 뮤지션 그리고 문화연대와 함께했던 시간이 어땠나요? 정말 궁금했어요. 

그 답을 아저씨의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들을 수 있었죠. 아저씨는 "사실 노동자들이 집회하면 사람들이 '저 사람들 또 도로 막네' 그러지 않나. 그래도 우리 투쟁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평화로운 투쟁, 투쟁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며 "기타는 내 인생이었지만, 투쟁은 나를 사회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했었죠. 아저씨의 생각과 마음은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어 있는 <임재춘의 농성일기>에서 읽어볼 수 있더군요.
 
전 늘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하고 현장에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하는지, 노동자가 예술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 왔어요.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느낄 수 있었어요.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노동자들과 함께 새긴 시간의 깊이와 서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예술을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강한 의지가 예술작업에 투여될 때에 예술가와 노동가, 예술과 노동자가 의미 있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2014년 수라바야 지역에 있는 콜트악기 노조를 만나고 왔었어요. 한국으로 치자면 민주노총 금속연맹 소속의 노동자들이죠. 박영호 사장은 1995년 인도네시아와 1999년 중국 대련에 공장을 지었다고 아저씨들이 알려주셨었죠. 신자유주의의 여느 기업들처럼 값싼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이윤을 챙기려 한 속셈이었어요. 인도네시아 콜트악기 노동자들은 박영호 사장에 대해 현지화에 성공한 것 같다고 말했어요. 박영호 사장은 요 몇 년 사이 인건비가 상승한 중국 공장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재료 수급도 용이하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인도네시아 공장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해요.

박영호 회장이 국내 언론을 통해 인도네시아 등 해외공장에서 기타 100만대와 앰프 30만대 생산을 홍보하고 콜트문화재단을 통해 기타를 기부하거나 경연대회를 열어 "소외된 사람들이 기타를 익히고 연주하면서 삶이 풍요로워졌으면 합니다"라고 생색냈었죠. 그러면서 경제 형편이 어려워 노동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걸 익히 알고 있었죠.

그런데도 2018년 예술 행동을 위해 그 공장 앞을 찾았을 때 한국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 규모에 깜짝 놀랐었어요. 공장에 갇혀서 밤낮으로 일해야 했던 한국 노동자들의 사정에 비하면 정시 출퇴근 시행과 3교대 무슬림 기도 시간을 보장하는 등 복리후생이 조금 나은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현실은 박영호 사장이 대전 계룡지역 콜텍 노동자들에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저 다른 공장보다 임금을 조금 더 주는 정도일 뿐, 여전히 지속고용을 빌미로 노동자가 열악한 상황을 견디도록 통제하고 있었죠. 유기용제 사용과 목재 분진이 가득한 공장에서 천 쪼가리 마스크를 지급하고 있었고요. 
 
 인도네시아 콜트악기 공장 예술행동 2018

인도네시아 콜트악기 공장 예술행동 2018 ⓒ 정윤희

 
인도네시아 노동법에는 회사를 운영하려면 반드시 노조를 수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서 이 조항에 따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지역 권력층과 정경유착을 한 박영호 회장은 노조원 200명을 한꺼번에 해고했다고 해요. 부당한 상황에 맞닥뜨린 노동자들은 결국 법정투쟁을 감행하며 다시 노조를 세웠지만, 회사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성향의 노조를 견제하고 있다고 했어요. 노조가 싫어 회사문을 닫아버린 박영호 회장 답죠.  

노동자를 사람이 아닌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 보는 회사의 관점은 인도네시아 공장의 노무관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죠. 이 소식을 들은 '콜트콜텍 기타 장인' 아저씨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어려움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노동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죠.  

전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13년간 밟고 밟아도 잡초처럼 일어났지만 결국 그 상처 때문에 곪고 곪아 갈등하고 반목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어려움을 넘고 또 넘어서는 모습은 마치 순례자 처럼 숭고하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에요. 사람이 존중받는 삶의 마지노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 아저씨들은 우리에게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죠. 
 
 부평 콜트악기 공장 침탈당한 후 2013.

부평 콜트악기 공장 침탈당한 후 2013. ⓒ 정윤희

  
 4464일 투쟁, 42일 단식을 마무리 하며. 2019

4464일 투쟁, 42일 단식을 마무리 하며. 2019 ⓒ 정윤희

 

13년 길 위에서의 투쟁, 42일 단식 후 명예복직, 퇴직 그리고 오늘까지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아저씨의 죽음이 너무 황망하고 애달픕니다.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집으로 돌아간 아저씨의 삶은 녹록지 않았었죠. 건물 짓는 공사판에서 철근을 나르기도 했고 경비로 일하고 공공근로 일을 했죠. 고된 노동으로 삶을 이어오던 아저씨에게 과연 휴식은 있었을까요?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그 따뜻함이 아저씨 자신에게도 향했을까요? 따뜻한 밥 한끼 가족들과 나누는 게 소망이라고 했었던 아저씨가 두 따님을 두고 떠나는 마음 오죽할까요. 그래서 우린 4월 봄의 신부가 될 둘째 따님을 만나서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 아저씨는 가는 길에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셨어요. 고마운 아저씨! 이젠 부디 편히 쉬세요.

2022년 1월 5일 
정윤희 작가 올림 

**콜트콜텍 기타 장인 고 임재춘 님의 예술 기록(업데이트중)

11년 12월 콜트콜텍 기타만드는 노동자 콜밴 결성
12년 부터 '콜트콜텍 이웃집예술가들'협업 


13년 10월 다큐멘터리 연극 <구일만 햄릿> 출연 
14년 7월 서울변방연극제 <법앞에서>출연 
16년 투쟁기록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17년 단편 <천막>출연
17년 투쟁 10주년 콜밴 음반 발매 
21년 다큐멘터리 영화 <재춘언니> 주연 
21년 장편 영화 <휴가> 주인공 '재복'의 모델(이란희 감독)
임재춘 재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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