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3 11:53최종 업데이트 22.11.1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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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독립운동가 안창호(安昌浩)와 동명이인인 친일파가 있다. 이름에 쓰는 한자도 한 글자만 다르다. 도산 안창호가 넓을 호(浩)를 쓴 데 비해, 친일파 안창호는 주나라 무왕의 도읍인 호경(鎬京)을 가리키기도 하고 '빛나다'를 가리키기도 하는 호(鎬)를 썼다.

도산 안창호는 호랑이띠다. 안창호는 대일 시장개방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2년 뒤인 1878년 11월 9일 탄생했다. 1878년 2월 2일부터 1879년 1월 21일까지는 호랑이해인 음력 무인년이었다.


함경북도 무산이 원적지인 친일파 안창호 역시 호랑이띠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출생 연도는 <친일인명사전>에는 1891년으로 적혀 있지만,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9권에는 "1891년 전후"로 쓰여 있다. 1890년일 수도 있고 1892년일 수도 있는 것이다. 1890년 1월 21일부터 1891년 2월 8일까지는 호랑이해인 음력 경인년이었으므로, 친일파 안창호가 이 기간에 태어났다면 도산 안창호와 띠동갑이 된다.

친일파 안창호는 한글 이름이 독립운동가와 똑같은 데 그치지 않고, 친일 이력마저도 독립운동과 밀접히 관련됐다. 그는 항일투사들을 전담하는 일제 경찰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항일세력을 정탐하고 수사하는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채롭다고 해도 될 정도의 다양다종한 방법으로 항일세력과 관련을 맺었다.

우선, 안창호의 임무 자체가 독립운동가 담당이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위 보고서에 적힌 결정문을 통해 "안창호는 일제의 경찰로서 조선총독부 순사보, 일본 외무성 순사와 순사부장을 거쳐 1930년대 초 일본 외무성 경부(警部)로 재직하였다"라면서 "일제 경찰로 근무하면서 밀정을 고용하여 간도 및 연해주 일대의 항일운동세력을 정탐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적발, 체포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침략과 지배에 적극 협력하였다"라고 밝혔다.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무대로 항일세력을 수사한 안창호는 이 세력을 정탐하고 체포하는 일뿐 아니라 이들에게 관광을 시켜주는 이례적인 이벤트에도 참여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1918년 4월 29일자 일본 외무성 문서 '배일 조선인 관광단원 명부 보고의 건'에 따르면, 22명으로 구성된 경성시찰단을 인솔하고 서울 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이 관광단은 모국방문단으로도 불렸다. 이 이벤트 기획자들이 생각하는 모국은 당연히 친일파 안창호의 새로운 나라였다. 안창호가 안내한 곳은 조선총독부 청사와 창경궁 등등이었다. 수원과 인천 등지에도 갔다고 한다.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경내에 들어선 것은 1926년이므로, 안창호가 인솔한 곳은 남산에 있는 총독부 청사였다.

반일적 인물들 회유

일본은 배일 성향을 띠는 만주·연해주 한국인들에게 '모국'관광을 시켜주는 일을 안창호에게 맡겼다. 은밀히 움직이는 정보 경찰에게 그런 공개 활동을 맡긴 것은, 안창호가 있어야 이 관광이 '맞춤형 관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일 성향 한국인들을 중립적 혹은 친일적 인물로 바꾸려면, 각자의 특성에 맞는 접근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맞춤형 접근법의 적임자로 안창호가 선발됐다는 것은 그가 현지 한국인들의 정치성향에 꽤 깊이 정통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안창호가 경성시찰단을 인솔한 것은 반일적 인물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안창호 본인도 회유를 받은 일이 있다. 진상규명보고서에 수록된 일본 공문서들에 따르면, 만주 룽징(용정)촌의 영국인 병원에서 그런 회유가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가 방원성 등으로부터 "순사를 사직하라"라며 "우리 민족이 일본의 관직에 있는 것은 독립운동에 장애가 되므로 속히 처결되어야 한다"는 권유를 받았다.

일본 공문서에 따르면, 방원성 등은 "협박적 언사"를 구사했다.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었을 일이지만, 안창호는 협박죄를 적용해 방원성을 체포했다.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독립운동가 방원성이 이 사건 때문에 "1919년 11월 체포되어 정치에 관한 협박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라고 설명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투사 유관순이 3년 형을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방원성의 '협박적 언사'에 대해 꽤 많은 형량이 선고됐음을 느낄 수 있다. 친일파 안창호가 자신이 받은 심적 압박을 과장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모국'의 순사를 그만두라는 말로 인해 자신이 받은 고통을 부풀리는 것이 그에게는 '애국'을 표시하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사직 권고는 결과적으로 현실이 됐다. 2년 뒤에 실제로 안창호는 간도 일본총영사관 순사직을 그만뒀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안창호 편은 "1921년 무렵 젠다오 일본총영사관 순사를 그만두고 간도구제회 서기로 근무했다"라고 알려준다.

간도구제회는 1911년에 화재 피해를 입은 룽징의 한국인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출범했다. 1921년 무렵에는 식민지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가 간도구제회를 직영하면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경찰 그만두고 이런 데 들어간 것을 알았다면, 방원성이 '그것도 그만두라'고 말했을 법하다.

고리대금업 직원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전업 2년 뒤인 1923년에는 그가 일본총영사관 순사부장이 되어 있었다.

쉬었다가 귀환한 안창호는 괴력을 발휘했다. 복귀한 그해에 동양학원 사건을 적발하는 실적을 거뒀다. 이 사건은 룽징촌 동양학원 교사인 방한민이 학생 10여 명과 함께 철도 개통식에 맞춰 총독부 관리들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이다. 사건 가담자들에게 징역 8년이나 10년 형이 부과된 중대 사건이었다. 안창호 입장에서는 대단한 실적을 세웠던 것이다.

친일행위의 종착역

9년 뒤, 안창호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1932년과 이듬해에 190명이 넘는 항일운동가들을 체포한 것이다. 일제의 만주침략 직후에 거둔 이런 실적으로 인해 1934년에 그는 경찰관리공로기장이라는 표창을 받았다. 이 상은 순직자가 아니고는 받기 힘든 상이었다. 그의 실적이 일본 정부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일본을 위해 대단한 실적을 남겼다는 점은 독립운동진영의 움직임에서도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은 청산리대첩 출신의 독립군 장교인 대한독립군단 제1연대 제1대대장 강승경이 형인 강승조에게 안창호의 사진을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설명하면서, "적의 관노가 되어 우리의 대업에 독해(毒害)를 가하는 악한 중에서도 우심(尤甚)한 자"로 안창호를 규정하는 대목이 편지에 있었다고 소개한다.

독립운동 대업에 해독을 가하는 악당 중에서도 특히 심한 악당으로 안창호가 언급됐다. 일본이 순직자 급에게나 주는 표창을 그에게 내준 이유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1918년에 27세 나이로 순사가 된 안창호는 그때부터 1939년 이전의 어느 해까지 제국주의의 밥을 먹고 살았다. 1921년부터 2년간 간도구제회 서기 일을 했지만, 동척 소속 기관에서 일했으므로 그 기간 역시 일본의 밥을 먹고 산 셈이 된다.

그런데 그가 친일행위로 획득한 재산이 약 20년간의 봉급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봉급 외의 부수입도 꽤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흔적들이 있다.

1933년, 그는 '범인 검거'의 공이 인정돼 상금 20원을 받았다. 그해 9월 27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달 하순에 서울 종로에서는 금 1돈이 10원 40전 정도에 거래됐다. 금 1돈보다 조금 많은 액수의 상금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34년에는 일본 정부가 봉급 이외의 수당을 더 지급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부수입은 비공식적인 루트로도 많이 나온 듯하다. 그가 48세 무렵일 때 보도된 1939년 8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 '명민한 기업가'에 따르면, 이 시점에 그는 동만농사주식회사라는 기업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이 회사는 토지 구입, 농장 경영, 농민 금융 등을 취급했다. 간도구제회 서기 때의 경험을 활용한 창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만농사주식회사는 사업 종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상당량의 자본이 있어야 차릴 수 있는 기업이었다. 이런 회사를 세웠다는 것은 그가 친일뿐 아니라 이재에도 열심이었음을 느끼게 만든다. 안창호라는 이름, 항일세력 담당 경찰이라는 이력으로 인해 독립운동과 이래저래 연관되는 그의 다종다양한 친일행위의 종착역은 결국 주식회사 설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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