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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풀무학교'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더불어사는 평민'을 표어로 걸고 있는 홍성의 작은 고등학교입니다. 한 학년에 한 학급, 한 학급에 25명 남짓의 학생들이 어울려 사는 곳인 풀무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24시간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더불어 사는 평민'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농사를 짓고 성서를 읽으며 각자의 배움을 찾아가는 곳입니다.

풀무에서는 1년에 한 번, '풀무제'라는 행사를 합니다. 한 달 동안 전교생이 팀을 나눠 한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서로 나누는, 나아가 마을 사람들과 학부모님들께 나누는, 풀무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 올해 2022년, 제 38회 풀무제는 '노동'을 주제로 해 공부했습니다.
 
풀무제의 현수막. 학교 정문에 걸려있다.
 풀무제의 현수막. 학교 정문에 걸려있다.
ⓒ 홍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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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동자입니다."

올해의 공부 주제인 '노동'옆에 붙는 부제목입니다. '나는 노동자입니다'. 고등학생, 곧 사회에 나가 제 할 일을 찾아 홀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다른 고등학교에서 수능을 위해 공부하고 대학 진학을 준비할 때, 풀무 사람들은 '곧 사회에 나가 일 해야 할 우리들이 노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노동에 대해 알아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 2, 3학년을 통틀어, 전교생 80여 명의 학생들은 12개의 소주제를 가지고 나눠져 공부합니다. 노동법, 기업과 노동, 언론과 노동, 여성의 노동, 노동과 예술, 노동과 인권, 노동조합, 사회초년생, 노동요, 참여시와 노동, 노동의 역사, 미래의 노동.

한 달, 각 소주제에 6, 7명씩 들어가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수업시간의 공부도 '노동'에 대한 공부와 엮어 함께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80여 명의 한 달이 담긴 공부를, 조금 나눠보고자 합니다.

노동이 처한 현실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과 편의를 위해, 즉 돈을 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위입니다. 몸과 머리를 사용해 노동력을 만들고, 그 노동력을 팔아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 이 노동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활동이나 생산된 상품을 관리, 판매하는 활동, 사회에 공헌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 기타 정신적인 노력 등을 통한 활동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이 '노동'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육체적인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노동'보다는 '근로'라는 단어가 익숙하고,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 계약서가 아닌 근로 계약서,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

노동은 본래 '노동자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단어임에도, 현재 사회에서는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강조하는 '근로'를 더 선호하고, 또 실질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공회대의 하종강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북한과 분단되며 생긴 이데올로기적 거부감, 반공주의의 잔재이자 현 자본주의 체제에 알맞은, 일하는 자의 주체성과 능동성보다는 성실하고 순종적인 모습을요구하는 표현이다."

비정규직의 문제, 상대적 약자라는 한계, 계속해서 희생하고 양보해야 하는 존재인 노동자를 공부했습니다.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법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 겪고 있는 불합리함, 어려움과 힘듦을 알려야 할 언론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이윤창출을 위한 행태, 노동착취와 부적절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그런 와중에도 일자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권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해졌고, 힘이 되어줬던 노래와 시는 멀어졌습니다. 더욱이 약자로 취급받는 여성과 아이, 청년들의 어려움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커져만 갔습니다.

단결하고 합심하여 투쟁하고 대항해야 할 노동자들은 서로를 동료로서 보지 않고 경쟁해야 할 타인으로 봤습니다. 닥쳐온 배고픔에 서로를 챙기지 않았고, 눈앞의 이익에 어렵게 이뤄낸 연대를 깨트렸습니다. 노동조합은 사방에 적을 두고 있었고, 거대해진 조직은 한 사람의 피눈물을 닦아주지 못했습니다.

당장 마주해야 할 미래
 
'노동'을 '예술'의 일부로 승화한 사진.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 순간을 페인트를 이용해 만들었다.
 "노동"을 "예술"의 일부로 승화한 사진.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 순간을 페인트를 이용해 만들었다.
ⓒ 홍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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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성향이 미리부터 굳어져 있던 탓일까요. '노동'에 대한 공부는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입장'과 '노동자의 어려움'으로 치우쳐 있었습니다. 약자를 볼 수 있는 시선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한쪽의 입장만을 듣고 공부하는 것은 그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당하는 박해와 불합리를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 해결 방법으로 떠오르는 것들은 너무나 멀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었기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에 마주해야 할 미래가 이와 같은 일의 연속이라면, 정말로 '현실'이 이런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말, 세상사가 다 그렇다는 말, 원래 사는 게 힘든 거라는 말, 항상 듣게 되는 뻔한 말들인데, 정말 그 안에는 이런 것들이 녹아 있던 걸까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고, 살아온 날은 살아갈 날의 절반도 되지 않는 어린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고 마주한 것은 참담함 뿐이었습니다.

태그:#노동,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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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학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환경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비판적 사고와 뚜렷한 주체의식을 가지려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올바른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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