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4 21:53최종 업데이트 22.09.25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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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앞으로 10년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한국 이주노동 10년 차인 네팔 시인 세세풍 쎄르마 림부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 학교 교장선생님이요. 아니면 그냥 선생님. 무조건 학교를 열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지금 네팔에는 진정한 교육자가 부족해요. 마을에는 학교 못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은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하고요. 그래도 공부하면 나중에 무엇을 성취할지 모르잖아요.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그는 2013년 한국에 왔다. 10년 후인 지금까지 여기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 때는 상상조차 못했으리라. 그는 화성에서 철근을 만들다 거제도 대우조선 하청업체로 옮겨왔다. 지금은 도장 파트에 속해서 수년째 야간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 산업이 위기를 겪는 사이 임금은 줄어들고 일은 더 고되다. 익숙해진 몸이 버텨주어 그나마 다행이다.
 

2022년 7월, 세세풍 시인이 거제 대우조선해양으로 출근하고 있다. ⓒ 세세풍

 

거제에서 세세풍 시인을 만난 것은 지난 7월 16일이었다. 그날의 거제는 무겁고 뜨거웠다. 조선업 위기를 이유로 삭감 당했던 임금을 되돌리기 위한 하청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45일째 진행되고 있었다.


정부가 '수년간 어려움을 겪던 조선업이 바야흐로 회복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시기에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상황'이라며 '법과 원칙을 내세워 엄정 대응' 하겠다고 밝힌 직후였다.

선박 건조장(도크) 안에 사방 1미터 크기의 철제 구조물을 만들어 자신을 가둔 처절한 농성 투쟁은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시인 세세풍은 그 파업 투쟁을 그저 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세세풍 시인과 만남을 주선한 김정열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부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하청노동자는 농성 투쟁하려면 해고를 각오해야 하고, 이주노동자는 미등록될 각오를 해야 해요. 그러니 이주노동자에게 같이 투쟁하자는 말을 하지 못해요."

이주노동자는 '비자'라는 족쇄에 묶여 있다. 그 탓에 '외국인들은 그런 데 가지 말라'는 회사 측의 지시는 겁박에 가깝다.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에게 노동3권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비자에 연동된 노동3권은 허깨비인 듯 실체가 없다.

어디 노동3권뿐이랴. 김정열 부대표는 회사 측이 이주노동자를 얼마나 다잡는지 말도 못한다고 했다. 지난해 미얀마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거제에서도 규탄 집회를 열었는데, 회사 측이 미얀마 노동자들 참여를 막더라고 했다. 회사가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집회 참여가 조직화와 권리 투쟁으로 이어질까봐 우려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로지 일만 하라 요구 받는 이주노동자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무참한 일이다.

세세풍 시인은 5년 전 같은 팀에서 일하던 고향 친구가 추락 사고로 사망했을 때 전심으로 지원하던 김정열 부대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김정열 부대표는 대우조선해양의 정규직 노동자로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 부지회장을 역임했다. 지금도 노조의 노동안전보건 업무를 하며 하청지회와 연대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한 듯 이주노동자들 곁에 서 있다.

정규직 노동자가 하청노동자, 이주노동자와 이토록 깊게 연대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매우 드물다. 김정열 부대표는 세세풍 시인이 동료들과 시집을 공동 발간한 일을 본인보다 더 자랑스러워했다.

'도허리' 품에서 시를 배우다

2020년 9월, 세세풍 시인을 비롯한 34명의 네팔 시인들이 한국에서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삶창)를 발간했다. 시인들은 모두 이주노동자가 되어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그도 시 두 편을 실었다. 그중 '어머니 가슴에 그어진 분단선'은 한국에 온 첫해, 화성에서 일하던 시절 쓴 시다.

당시 한국은 북한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뉴스는 긴박했고 전투기는 자주 하늘을 오가며 긴장감을 높였다. 시인은 내전으로 상처 입은 네팔을 떠올렸다. 전쟁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그에게 남북한의 분단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몸이 갈라진' 것처럼 분단을 아프게 느꼈다.

매번 심장이 떨리고/땅속 깊은 곳에서 오만함이 진동하여/평화의 자손들이 유산되고 있다 (어머니 가슴에 그어진 분단선 일부)

세세풍 시인은 네팔인들의 시 사랑이 유별나다고 말한다. 삶이 고달프니 넋두리처럼 시가 쏟아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것이 '도허리'다. 도허리는 네팔 전역에서 부르는 민요로, 주로 남녀가 맞상대하며 서로 대화하듯 노래를 주고받는다. 질문과 대답, 놀림과 대응이 어우러지는 즉흥 노래가 게임처럼 이어진다. 가수 혼자 노랫말을 만들기도 하고 팀을 이뤄 머리를 짜내기도 한다. 사랑과 배신, 삶의 고통과 환희, 다양한 정치사회적 주제를 해학으로 풀어낸 재치 넘치는 가사는 웃음과 환호를 끌어낸다.

'레썸피리리'라는 잘 알려진 네팔 민요가 있다. 네팔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이라면, 골목에서 산자락에서 무수히 들려오던 노래를 기억할 테다.

"레썸피리리도 도허리에서 나왔다고 봐요. 60년대에 음반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미 널리 불리던 노래를 채집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마을에 가면 도허리 할 때마다 레썸피리리를 부르죠. 부끄러움이 많아서 내가 직접 도허리를 불러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항상 듣고 자랐죠. 도허리 부르는 친구와 한 편이 되어 같이 노랫말을 만들기도 했어요. 도허리 문화가 네팔인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거예요."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한국어판과 네팔어판 ⓒ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도허리 품에서 성장한 시인은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그가 진심을 담아 쓴 시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는 '몸을 갈아 넣는 노동'을 이국땅에 바치고 있는 네팔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직장인들이 저마다 주머니 속에 품고 있다는 사직서 같은 시, 참았던 숨이 터지며 나오는 긴 한숨 같은 시다.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당신의 메마른 흙이
내 땀으로
목마름을 달래는 하루하루
내 꿈은 죽어갑니다
목장갑에 손이 매이고
안전화에 발이 붙들려
내 것 아닌 노동에 갇힌 나날
인생의 길목에서
밀려난 행복은
저 멀리 묶여있어요
열린 하늘의 새처럼 날아가야 할 시간
그래서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내 삶이 온통 녹아내려
기름진 당신의 흙은
계속 씨앗을 싹틔울 거예요
정성들여 피워낸 벚꽃을 당신 곁에 두고 갑니다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너무 많은 시간을
당신 농장에서 종종걸음으로 보냈어요
당신 오이 밭에
당신 딸기 밭에
비닐하우스 구석에
살아있는 내 꿈이 갇혀있어요
이제 당신은
홀로 사과를 따야 해요
땀 흘려
미나리를 키우러
나 없이 가야 해요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당신 꽃밭에 선 무궁화에게 빌린 웃음을
당신에게 파는 사이
내 고향의 랄리구라스*는 지고 또 졌어요
당신 벚꽃에게 주던 미소를
내 고향 금잔화 천일홍*에게 주고 싶어요
그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는
누이 손에서
더는 금잔화 꽃잎이 시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사장님,
나는 이제 농장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노래방 도우미에게
사랑을 구하였던가요
도허리를 부르며 만난 내 연인은
사랑이 수놓인 손수건을 들고
지금껏 나를 기다립니다
사장님 혼자 노래방에 가야 해요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세상의 절반을 건너온 철새가
수천 마일을 날아
다시 제 고향으로 가는 시간
종일 숲에서 놀던 가축들이
다시 헛간으로 찾아드는 저녁
수평선을 넘어 쉼 없이 달려온 파도가
다시 바다로 넘어가는 이때
나도
발길을 돌려
첫 발을 디뎠던 땅을 향해 갑니다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랄리구라스_네팔 국화
*금잔화, 천일홍_네팔 명절 바이티카에 사용하는 꽃. 여자형제가 남자형제 이마에 붙여주며 행복과 건강을 기원한다

사라져가는 림부 말을 살리려는 노력

"나는 네팔어와 림부어로 시를 써요. 우리 할머니는 림부어만 할 줄 알고 아버지 어머니는 네팔어를 같이 사용하기 시작한 세대예요. 내 동생들은 림부어를 아예 몰라서 할머니와 대화하기 힘들어요. 언어와 문자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어요."

그의 고향 빤쩌떠르는 네팔 동북쪽 산간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다. 먼 옛날 중국에서 건너온 림부족이 다수를 이루고 불교도가 주를 이룬다. 125개 민족이 123개 언어를 사용하는 네팔은 힌두교인이 팔 할이다. 그밖에 불교와 이슬람교, 기독교, 다양한 토착 신앙이 삶을 관장한다.

나라의 흐름을 엮어가는 강력한 힘은 힌두교다. 3억 3천만의 신이 있다는 힌두교이므로 포용력이 크다지만 그래도 소수종교인 입장에서는 그 힘을 견디기 쉽지 않다. 내부적으로도 힌두 문화를 얼마나 수용하고 따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고 여러 의견으로 갈린다. 큰 힘에 끌려 무작정 따르다보면 내 것이 모두 사라질까 두렵다.
 

2020년 1월, 거제 기숙사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 세세풍 시인 ⓒ 세세풍

 

림부어도 그렇다. 전국에 걸쳐 공교육이 강화되고 네팔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니 소수언어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그를 비롯한 림부족 작가들은 림부어를 비롯한 소수 언어와 문자를 계승할 수 있도록 정책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림부어로 시를 써서 발표하고, 소수언어를 왜 보존해야 하는지 알리고 있어요. 림부 말과 문자를 가르쳐주는 일도 합니다. 아, 림부 말 하나 알려드릴게요. 사랑해요를 '밈멘네'라고 해요."

밈, 사랑. 멘네, 해요. 밈멘네! 고향에 학교를 세우면 학생들에게 림부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시인은 말한다.

네팔이 더 좋은 사회가 되기를

시인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지만 네팔 사회를 조망하며 네팔이 더 좋은 사회로 변화하는데 기여하고 싶다. 그래서 한국을 살펴 세밀히 기록하고 기사와 칼럼으로 네팔 사회에 소개한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그 내용과 과정을 잘 살펴봤어요. 정해진 일정에 따라 자유롭고 공정하게 선거를 진행하고 굉장히 빠르게 투표하고 집계하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고 뉴스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들 대부분은 한국에 있어도 선거가 언제인지도 몰라요. 이민자들이 소외되는 것은 좀 아쉬웠어요."

지난 6월 한국에서 지방선거가 진행되던 시기 네팔에서도 지방선거가 있었다. 그는 한국의 정치, 선거운동과 투표, 집계과정을 상세히 담은 기사를 네팔 언론에 실었다.

"한국 정치 문화를 네팔에 소개하고 싶었어요. 네팔은 정치가 아직 불안정하고 격해요. 선거 때마다 폭력과 죽음이 있어요. 심지어 멀리 외국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이 소셜미디어에 좋아하는 정치인 사진을 올리고 지지 의사를 밝혀도 당장 경고가 날아와요. 너 나중에 네팔 오지 마라, 오면 가만 안 두겠다."

그는 네팔 정치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부정선거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고, 선거 절차와 내용의 공정성을 강화하고, 선거 일정을 명확히 해서 정치인들에 의해 뒤틀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팔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쓴 그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는 어떤 갈등이 있더라도 국민의 주권, 헌법, 법률, 국가를 인질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주권자들이 매 선거마다 보여주는 높은 시민의식은 정치의 앞날이 밝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한국 그리고 네팔

그가 가지고 있는 E-9(비전문취업) 비자는 3년간 취업할 수 있는 비자이다. 정부는 3년으로 정한 이유를 '정주화 방지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용자가 재고용을 원하는 경우 1년 10개월간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 합하면 4년 10개월이다. 사용자로서는 이런 경력자를 그냥 내보내기 아깝다.

정부는 다시 사용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실근로자 제도'를 만들었다. 4년 10개월간 직장을 옮기지 않고 일했다면 '성실근로자'로 인정해 4년 10개월간 다시 일하게 하는 제도다. 성실근로자, 이 얄팍한 이름이 스스로도 민망했던지, 정부는 후에 명칭을 '재입국특례고용허가'로 바꿨다. 직장을 옮기지 않았어야 한다는 조건도 버렸다. 동일 업종 내 이동은 인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주노동자가 정주하는 것은 싫고 숙련된 노동만 이용하고 싶다는 욕심이 변칙에 변칙을 부른다. 정직하지 못하다. 노동력이 필요하다면 그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노동자를 3년 단위로 교체하는 '단기순환'에서, 자리 잡고 살며 함께 일하는 '노동 이민'으로 정책을 바꿔야 할 때다.

"비자를 E-7(숙련기능인력)으로 바꾸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비자는 내년으로 끝나요. 그 뒤로도 계속 일하려면 비자를 바꿔야 해요. 법무부 사회통합 5단계도 패스해야 하고 사회봉사활동도 해서 필요한 점수를 맞춰야 해요. 쉽지 않겠지만요."
 

2022년 7월, 서울, 동료 시인 디파라이의 시집 출판기념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세세풍 시인 ⓒ 세세풍

 

하지만 그것은 '사장님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와는 전혀 다른 미래가 아닌가!

"마음과 현실이 달라서 더 슬픈 겁니다. 우리 네팔 젊은 사람들은 거의 다 외국에 가서 일하고 있어요.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같은 말을 해요. 네팔 사람은 네팔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고향에 돌아와 어려운 나라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아무리 네팔에서 일하고 싶어도 네팔에는 일자리가 없어요. 네팔은 절실하게 돈이 필요하고요. 네팔이 벌어들이는 달러 중 상당액이 노동자들이 일해서 벌어 보내는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나라에서 직접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기서 돈 벌어 보내고 기술 배워 가져가는 것도 도움이 되잖아요. 지금은 할 수 있는 만큼 돈 벌어 보내고, 나중에 돌아가서 꼭 필요한 일을 해야죠."


세계은행에 의하면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2018년 82억 9천만 달러를 가족에게 송금했다고 한다. 전 세계 이주노동자 송금액 순위 19번째이고, 네팔 GDP(국내총생산)의 약 27%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주노동자의 송금이 없으면 개별 가구가 빈곤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또한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의 선택에는 이런 무거운 배경이 숨어있다.

"한국에 온 거 잘했다고 생각해요. 국제이주는 긍정적인 일이죠. 역사를 길게 보면 국가라는 개념은 최근에 만들어진 거잖아요. 원래 세상은 하나였던 건데요. 어디라도 가서 일하고 살아야죠. 그게 인류의 역사잖아요."

세상 어디로 옮겨가 살아도 좋다고 하지만 시인의 가슴 속에는 늘 네팔이 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고, 고향에서 더 좋은 삶을 일구고 싶은 희망이 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 시인, 그의 오늘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란다.

* 필자 소개 : 이란주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다. 저서로 <말해요, 찬드라> <로지나 노, 지나>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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