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5 21:22최종 업데이트 22.08.0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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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 [편집자말]

성미산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댄스워크숍 중인 엠마누엘 사누씨. ⓒ 김나연

 
매주 일요일 오후,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봉쿠라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아프리카 만딩고 춤을 배우기 위해서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제각각인 이들 중에는 무용수도 있고, 취미로 춤을 배우거나 춤을 처음 접해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춤 선생님은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엠마누엘 사누'씨다.

엠마누엘씨는 무용단체 '쿨레칸'의 댄서이자 안무가다. 서아프리카 전통춤인 만딩고를 기반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안무가들과 함께 현대무용을 수련했다. 자국 내 예술경연대회 수상 경력을 바탕으로, 2007년 아프리카 최초의 오페라인 <사헬 오페라>의 무용수로 발탁되어 유럽 각지에서 공연했다. 이후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창작 공연과 교육 활동을 해오던 중 2012년 한국에 오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워크숍의 이름은 '일요일 춤이 있는 삶'. 5~6월 두 달간 배우는 춤은 용기의 춤 '구룬시'다. 코로나로 힘들었지만 용기 있게 이겨내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봉쿠라지'라는 이름도 '용기를 내자'는 뜻이다. 처음에 가벼운 몸풀기로 시작해서 신나는 아프리카 음악에 맞추어 동작을 배우고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다. 박자도 낯설고 동작도 서툴지만 춤을 추는 모두의 표정이 즐겁다. 마지막에는 모두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서 한 사람씩 나와 춤을 추는 시간을 갖는다.

수요일과 일요일 스튜디오에서 하는 댄스워크숍 말고도, 그는 매주 노들장애인야학과 성미산학교에서 장애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춤 수업을 한다. 2014년부터 국내 여러 학교와 기관, 단체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장애인과 성인을 대상으로 만딩고 댄스워크숍을 해왔으며, 노들장애인야학은 2016년부터 6년째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멈추었던 창작 활동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5월 엠마누엘씨는 마산 국제춤축제에 참여해 부르키나파소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를 규탄하는 내용의 공연을 발표했다. 현재 다양한 장르의 작가 및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아프리카 노예 역사에 관련된 공연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되었을 때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제 일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내 일을 이어갈 수 있을까, 다른 일을 해야 하나 걱정했어요. 예정되어 있던 공연들도 모두 취소되고 진행하고 있던 수업도 잠깐 멈추었습니다. 이후에는 온라인으로 대체하거나 소규모로 이어갔습니다.

수입은 이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지만 지금 처한 상황에 어떻게든 대처하려고 노력했어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 제게는 아주 큰 힘이 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다른 이주민예술가들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고 한다. 엠마누엘씨의 경우 '결혼비자'를 가지고 있어서 구청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예술흥행(E-6) 비자'로는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모든 공연과 교육 활동이 취소된 상황에서, 소규모 수업을 진행하며 경제활동을 이어가거나 친구와 가족의 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엠마누엘씨도 처음에는 'E-6 비자'로 이곳에 왔다. 2012년 포천 아프리카예술박물관과 계약을 맺고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당했다. 아프리카 출신 예술가들을 상대로 자행된 노동착취와 인권탄압은 당시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박물관 측은 아프리카 예술가들에게 2년의 계약기간 동안 비행깃값 명목으로 10만 원을 떼고 매달 50여만 원을 지급하고 하루 식대 4000원을 지급했다. 이는 당시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계약서상의 내용도 지켜지지 않았다. 마음대로 공연 횟수를 늘리기도 하고 계약에 없던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쥐가 나오고 보일러도 없는 방에서 머물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몇몇 동료들은 박물관을 뛰쳐나갔다. 그 후 박물관은 남은 이들의 여권을 압수했다.

2년 계약이 끝나고 계약을 갱신할 시기가 오자 엠마누엘씨를 비롯한 동료 예술가들은 새 계약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박물관 측은 재계약을 거부했다. 계약이 종료되면 일자리를 잃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체불된 임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날 형편에 처한 이들의 사정은,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당시 사건에 대한 물음에 어려운 질문이라고 말했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더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것은 굉장히 나쁜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차별을 겪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과거도 아니고 지금 현재 이곳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수없이 질문했습니다.

누군가 저를 존중하면 저도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힘을 과시하려 하면 저 또한 그에 맞서 대적합니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존중해야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사건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 활동의 지향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작품으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것을 계기로 그 방향성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사회 안에서의 소수자에 대한 이슈나 작은 목소리들, 이러한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함께 서야겠다, 내가 그들의 곁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굉장히 부드러운 사람인데 뭔가 되게 강한 파이터가 되었다고 할까요."

엠마누엘씨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데게베'라는 작품을 만들어 2016년 첫 공연을 올렸다. '데게베'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라는 뜻으로,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차별과 폭력을 이야기하며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에게 '예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그 본질을 일깨워주고 "진실을 알리는 일"이다.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편중된 "불균형한 사회 속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한국에서 이주민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인터뷰 중인 엠마누엘 사누씨. ⓒ 김나연


엠마누엘씨는 현재 '예술흥행(E-6) 비자'가 아닌 '결혼비자'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E-6 비자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비자 연장 문제로 항상 불안했다고 한다.

"E-6 비자로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 마치 노예가 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비자를 유지하거나 중지시킬 권한은 '사장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일을 당해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계약이 파기되면 불법체류자가 되기 때문에 제게는 선택의 여지나 권한이 없었습니다."

현재 외국인 예술가가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문화예술(D-1)' 또는 '예술흥행(E-6)' 체류 자격으로 사증을 받고 국내에 입국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 비자로는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체류하면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과 경제 활동을 이어 나가기 어렵다.

'D-1'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학술이나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비자로 사실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하다. 유학을 와서 생계유지에 필요한 활동을 할 수 없고, 졸업 후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어도 비자 취득이 어렵다.

'E-6'는 외국인이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다. 한 번에 최대 2년간 머무를 수 있고 고용계약서가 있어야만 발급받을 수 있다. 발급 분야도 방송, 연예, 스포츠, 호텔 공연 등에 한정되어 있어 순수 예술 창작을 주로 하는 프리랜서는 비자를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계약 관계에 있는 예술가는 고용주에 종속되어 활동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노동착취, 임금체불, 인신매매, 성폭력 등 인권침해까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행 비자 제도에서는 순수 창작 활동을 하는 외국인 예술가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국인 예술가가 기획사나 소속사 계약 없이도 독자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고, E-6 비자로 왔더라도 일정 기간 국내에서 활동을 한 경우에는 비자의 형태를 좀 더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제도와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또한 그는 이주민 예술가에게도 예술 활동을 지원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인 예술가들도 작품 활동만으로는 생활이 어렵고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예술가들은 아예 지원받을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응모해서 떨어지는 건 괜찮아요. 그저 응모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는 얘기입니다."

공동체의 힘

2014년 엠마누엘씨는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쿨레칸'이라는 무용단체를 설립했다. '쿨레칸'은 '뿌리의 외침'이란 뜻으로, "우리 모두는 여행자들이며 어디를 가든 자신의 존엄성과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춤의 뿌리는 '만딩고'다. 만딩고는 부르키나파소가 위치한 서아프리카 지역의 민족과 문화를 뜻한다. 유럽의 식민 지배를 거치며 지금은 여러 나라로 나뉘었지만, 과거 하나의 왕국이었던 그곳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 또한 그의 고국인 부르키나파소는 문화와 언어가 다른 63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만딩고' 문화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도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만딩고에서 둥그렇게 원을 이루어 추는 춤이 있는데, 그 원 안에서는 위아래 구분 없이 모두가 동등합니다. 모두 함께 춤을 추다가 한 명씩 혼자 나와 춤을 출 때가 있어요. 그 시간은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어른도 어린이도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사건을 겪고도 한국에 남게 된 이유는, 이런 만딩고 문화를 알리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저는 공동체에서 자라났고, 그 안에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 속에서 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화하고 해결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배울 수 있어요.

그리고 공동체는 여기에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일이 나에게 생겼을 때 누군가 나를 위해 행동하고 목소리를 낼 거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동체는 모두를 함께 성장하게 하고 인간으로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게 해 줍니다."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고 개인 간의 소통이 단절되어가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 '쿨레칸'이 강조하는 것도 춤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공동체'다.

"춤은 빠르게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예술이에요. 언어나 대화가 없어도 함께 움직이고 땀을 흘리다 보면, 어떤 감정과 에너지를 같이 느낄 수 있어요. 춤의 강한 힘은 우리를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로 인식하게 해 줍니다.

저에게 춤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에요. 제 춤은 항상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춤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요소이며 우리가 살아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뿌리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댄스워크숍 중인 엠마누엘 사누씨. ⓒ 김나연

 
한국에서 10년간 이어온 그의 노력은 크고 작은 결실을 맺었다. 무엇보다 쿨레칸 댄스워크숍을 통해 만난 많은 이들이 그에게 큰 의미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노력해온 작업들이 커다란 사랑과 평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특히 6년 동안 함께 해온 노들장애인야학은 그에게 특별한 곳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긴장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였죠. 어떤 분은 항상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셨어요. 제가 손을 잡으려고 하면 싫다고 뿌리쳤죠. 그랬던 분이 지금은 먼저 다가와 손을 건네고 포옹해 줍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그는 춤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몸과 몸으로 연결되는 시간 속에서 더디지만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사건 당시 엠마누엘씨를 도왔던 한국인 친구 중에는 현재 그의 아내인 소영씨도 있었다. 박물관의 참상을 알릴 때도, 무용단체인 '쿨레칸'을 결성할 때도, '봉쿠라지'라는 공간을 열 때도, 모든 중요한 순간에 항상 소영씨가 함께했다.

연인 관계였던 두 사람은 2019년 결혼하여 작년에 딸을 낳았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을 이룰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리고 아내와 딸과 함께하는 현재의 삶에 매일 기쁨을 느끼고 있다"라고 했다.

그가 고향 집을 떠날 때 부모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네가 그곳에서 너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모두를 가지면 좋겠다"라고.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그런 가족들이 있다. "사람이 어디를 가든 누군가가 필요하다"라는 그의 말처럼, 가족과 공동체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이방인에게 낯선 곳에서 뿌리내리고 정착할 수 있도록 든든한 땅이 되어주었다.

엠마누엘씨는 자신의 딸이 "하나의 기준만 강조하지 않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 안에서 자라나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업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구어 온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춤으로 소통하고 함께 성장하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단절되어있던 이들과 춤으로 함께 연결되고자 올렸던 온라인 영상의 제목처럼, 용기를 주는 그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계속 춤추자! 이 싸움 안에서'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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