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합의 이후의 공백

'다음'을 약속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약속은 다음을 존재하게 하고, 다음은 일상을 만들어준다. 국가 간에도 약속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합의 혹은 협정이라고 부른다.

합의를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는 사람들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욱 혹독하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한국 그리고 주변 국가들간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94년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미국의 국제원자력기구(IAEA)특별 사찰의 압박요구와 이에 따른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로 위기를 맞게 된다. 전임 대통령의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노력으로 합의는 엉거주춤 진전됐지만,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강경파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의 강경책이 맞물려 '제네바 합의'는 깨어지고 만다.

약속을 파기한 대가로 서로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당사자들은 다시금 약속을 맺고 상대만이 줄 수 있는 과실을 얻고자 했지만, 독재자 김정은과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는 트럼프 그 누구도 먼저 자존심을 굽힐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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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수하는 문재인-김여정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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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재인 대통령의 끊임없는 설득과 평창 동계올림픽은 두 지도자의 면을 세워주기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평창올림픽 이후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 사이에 숨 가쁜 '합의'를 위한 과정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일, '봄이 온다'라는 주제로 한국의 가수들이 평양에서 공연을 진행했으며, 5일 판문점에서 실무회담이 개최됐다. 오는 27일에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의 두 정상이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와 김정은도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은 서로가 '약속'이 절실히 필요로 했음을 나타낸다.

'친미 북한' 만들기

하지만 약속 그 자체가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나가느냐, 더 정확히는 이후에 어떤 대북정책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서로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낮은 연방제를 시행하는 것. 둘째, 북한의 독재정권을 망명시키고 한반도 내에서 한국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 셋째, 북한을 친미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 세 개의 선택지에서 우리는 마지막 즉, '북한을 친미국가로 만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의 입장에서도 이는 최고의 옵션이다. 그는 당장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으며, 안보비용의 경감과 미국의 지원으로 경제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실례로, 핵 폐기 이후 친미주의 노선을 걸었던 사우디는 국민 소득 2만 달러가 넘는 아랍의 맹주로 성장했다. 반면 미국과 각을 세웠던 이란·이라크는 같은 산유국이지만, 국민소득은 사우디의 1/4수준에 그친다.

물론, 미국이 일방적인 시혜를 베풀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대가로 미국은 '미군의 북한 주둔'을 얻을 것이다. 그 미군의 형태는 육군 혹은 중립군으로서 치안 유지를 담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중국을 북한이라는 버퍼 존(buffer zone) 없이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지난 1992년, 김용순 노동당 국제비서가 "미군이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다"라며 관계 정상화를 제안했던 것을 상기시켜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핵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미군이 북한에 직접 주둔함으로써 유사시 중공군이 북한을 점령하여 발생할 수 있는 위협을 줄일 수 있게 된다.

북중동맹의 공고성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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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중국 방문, 시진핑 주석 인민대회당서 연회 개최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고 3월 28일 보도했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23월 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마련한 연회에 참석해 시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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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선행돼야 한다. 북한이 중국의 손을 놓고 미국의 품으로 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중 동맹의 공고성에 대해 고찰해 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과 중국의 동맹은 붕괴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결속력이 단단하지 못해 보인다.

그 판단의 근거 첫째는, 양국의 동맹은 냉전과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배경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중국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한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김일성은 6.25전쟁 동안 권력투쟁을 통해 무정, 박헌영 등 잠재적인 경쟁자와 박일우와 같은 친중국 성향의 인사들도 권력에서 배제시켰다. 연안파(북한의 공산당)를 숙청한 종파사건이후 북한과 중국의 사이는 경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 협력, 한미 동맹, 미일 동맹 속에서 고립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의 전략적 동맹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태생부터가 단단하지 못했기에, 북한은 충분히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미국의 손을 잡을 수 있다.

둘째로, 중국과 북한은 동맹의 실질적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북한과 중국의 군사협력은 큰 변화를 겪었다. 냉전시기에는 중국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 매년 1억 위안 상당의 물자를 무상 지원했다.

하지만 무기원조는 한중 수교 직후 중단되었고, 미사일과 포는 1995년 이후 지원이 중단되었다. 매번 북한의 반발을 사는 한미합동훈련은 양국간의 동맹을 과시하는 행위다. 그런데, 북한과 중국은 동맹을 체결한 이후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은 동맹의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에 더해, 중국은 한중수교 이후 북한에 대해 '혈맹'이란 표현 대신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북한에 대한 중요성을 경감시키기 위함으로 파악할 수 있다.

셋째로, 북한의 핵 실험 이후 보여준 중국의 단호한 태도다. 중국의 만류를 무릅쓰고 2006년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에 중국 외교부는 "중국 정부는 단호한 반대 입장을 표한다. … 형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일체의 행동을 중지하며, 6자 회담에 복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라며 미국과 한국과 같은 선상에서 북한을 비난했다. 북한의 2차 핵실험에 대해서도 유엔안보리 결의안에 찬성하면서, 동맹국을 제재하는 데 일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결국, 양국의 동맹을 묶어주는 정치적 신뢰마저 붕괴된 것이다. 북한에 대한 중국이 단호한 태도는 시진핑 정부에까지 유지되고 있다. 물론, 중국이 북한의 손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국의 유대가 충분히 느슨해 졌기에 북한이 친미노선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국의 역할: 게임설정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문재인 정부가 주고 있다. 미국과 북한이 다음 약속을 잡을 수 있도록, 이번 약속의 장을 마련해주면 된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처럼 양국의 지도자들이 충분히 면을 세울 수 있는 자리일수록 좋다. 우리는 특정한 조건을 제시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양국이 상호 신뢰와 의존성(inter-dependence)을 배양할 장을 마련하면 된다.

안타깝게도, 북한과 미국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이 없으면 양국이 패를 교환할 게임이 열리지 않는다. 단순히 봄이 왔다고 해서, 이번 가을에 풍년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부지런히 밭을 가꾸고, 물을 주며, 잡초를 뽑으며 제 할 일을 묵묵히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