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정인기 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천진난만하게 자란 정민(강하나 분)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끌려간다.

아버지(정인기 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천진난만하게 자란 정민(강하나 분)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끌려간다. ⓒ (주)와우픽쳐스


"내가. 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굵은 빗줄기가 눈에 정통으로 꽂혔다. 빗물은 눈물로 바뀌어 얼굴을 타고 흐른다. 물기는 이내 입술에 와 닿았다. 짜고 쌉쌀했다. 옆자리 관객에게서 나오는 긴 한숨 소리. 그도 흐느껴 우는 것이 확실했다. 손이 눈으로 가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나도 심장이 떨려 입술을 깨물었고, 손가락을 꼬집어야만 했다. 울분을 참을 수 없었고,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영옥(손숙 분)은 '정신대 신고전화'가 개설됐다는 소식을 듣고 면사무소를 찾아간다. 면사무소에 켜진 TV에서도 정신대 관련 소식은 민원실 공간 구석까지 파고든다. '신고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영옥. 면사무소 직원으로부터, "뭘 도와드릴까요?"라는 물음에도 혼이 빠져 정신이 없는 영옥이다. 이때 영옥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한 마디.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과거를 밝혀. 안 그래?"

면사무소 직원끼리 속닥거리는 소리에 영옥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분노로 가득한 얼굴에 목소리는 비명에 가깝다. '미친년'이라 내뱉는 한 마디는, 자신을 학대하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원망이자, 이 아픔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절규로 들렸다. 나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의 표현이었다.

영화 <귀향>의 누적 관객 수가 개봉 12일 만에 267만(2016. 3. 7.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제공)을 넘어섰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아니고, 스타급 배우가 출연하지도 않는 작은 영화의 대기록이다. 관객의 반응은 뜨겁기만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식을 줄 모른다. 급기야 그 열기는 국경을 넘어 해외시장까지 번졌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대만 등에서 한인 단체와 대학을 중심으로 상영 문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 캐나다, 영국은 개봉 예정으로 구체적인 시기와 상영관 수를 조율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작은 영화가 만들어 낸 큰 울림

 일본군에게 끌려간 소녀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일본군에게 끌려간 소녀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 (주)와우픽쳐스


영화 <귀향>이 이토록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최근 한일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졸속 협상 타결로 인한 좌절과 분노가 집단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잊고 있던 아픈 역사에 대한 자성이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내가 극장을 찾았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귀향>은 14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됐다.  2002년 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조정래 감독의 진심 프로젝트가 통해서일까. 연기파 배우 손숙, 오지혜, 정인기와 재일교포 배우들이 재능기부로 출연을 결정했다. 세계로 항해할 배의 선장과 선원은 확보한 셈. 여기에 또 하나의 힘이 보태진다. 75,270명의 시민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것이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영화 <귀향>은 해방 전인 1943년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정인기 분)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정민(강하나 분)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의 품을 떠난다. 끌려가는 딸에게 어머니(오지혜 분)는 흐느끼면서 부적, 괴불 노리개와 돈을 쥐여주며 신신당부한다.

"내 말 단디 들으래이. 울지 말고. 진짜로 급할 때 이 주면서 거창 땅 한데기골로 데려다주세요. 그 캐라. 알았나."

정민은 울먹이며 "거창 땅 한데기골로 데려다주세요"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라 한다. 이후 또래 소녀들과 기차에 몸을 실은 정민은 알 수 없는 공포의 땅으로 향한다.

분노를 일깨우다

제2차 세계대전은 참혹했다. 군인은 물론이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일본은 군인들만이 아니라 민간인까지 징집했다. 그것도 모자라 어린 소녀들까지 강제로 끌어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까지 했다. 무자비한 폭행, 억압을 통한 공포, 무차별하게 벌어지는 처참한 살육. 영화는 소녀들이 겪었을 공포의 순간으로 가득 찼다. 실제 상황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소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영화의 장면마다 관객의 분노를 일으켰다. 슬픔의 눈물이 흘렀고, 힘겨운 싸움에 슬픈 마음으로 대신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무기력 그 자체였다.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은 화면이 아니라 화면 속에 녹아든 삶 그 자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심장이 떨렸고, 찡한 느낌이 육신을 떠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이자, 나의 누이요, 나의 여자 친구였던 청순했던 열다섯 소녀 정민이. 정민이는 옛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을 되돌려 놓았고, 한편으로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

영화 <귀향>은 아리랑의 진하고 구슬픈 가락과 함께 막을 내린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아리랑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두물머리 백 년 넘은 나무에 걸린 소망지에 굿 소리는 잠시 휴식을 취한다. 휘날리는 소맷자락 움직임은, 가슴 찢어지는 떨림으로 하늘로, 허공으로, 가로지른다.

영화는 관객에게 슬픔과 분노를 선사한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역사지만, 기억해야만 할 역사적 사실을 일깨운다. 역사에서, 우리의 기억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아픈 진실이지만 숨길 수 없는 역사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도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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