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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를 탄 하노이 시민들이 40년 전 독립궁에 진입한 탱크를 그려 넣은 베트남전 40주년 알림판 앞을 지나고 있다.
 오토바이를 탄 하노이 시민들이 40년 전 독립궁에 진입한 탱크를 그려 넣은 베트남전 40주년 알림판 앞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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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30분, 사이공(현 호찌민)이 함락되었다.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제203기갑여단 소속의 소련제 탱크와 이를 뒤따르던 제304보병사단 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 지 30여 분 만이었다. 앞서 즈엉 반 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이 9시30분 사이공 라디오 방송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지 2시간 만이었다.

프랑스가 북베트남군에 패배해 물러나자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1954년부터 치면 21년 만이었다. 프랑스가 무력으로 다낭을 점령한 1858년부터 치면 117년 만에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117년 동안의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난 뒤에 베트남 사람들이 맨 먼저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전후 최초의 건조물은 미군의 전쟁 증거를 쌓아둔 전쟁증적(證積)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이었다. 1969년 미 <뉴욕타임스> 보도로 '더러운 전쟁'이라는 반전 여론에 불을 붙인 '미라이 학살' 관련 자료만 모아둔 미라이박물관도 1976년에 준공되었다.

한국군이 주둔한 중부지방 곳곳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다. 오랜 전쟁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못 먹어 피골이 상접한 시절이었다. 그 힘든 시기에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쌀을 거둬 세운 증오비는 60개나 되었다.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기억 투쟁의 산물이다.

베트남전 한국군 전사자 5천명 vs. 민간인 학살 5천명

호찌민 시내의 전쟁증적기념관 앞에 선 구수정 박사(왼쪽)와 박물관 관계자. 구수정 박사는 유학생 시절인 1999년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실을 처음 발굴해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호찌민 시내의 전쟁증적기념관 앞에 선 구수정 박사(왼쪽)와 박물관 관계자. 구수정 박사는 유학생 시절인 1999년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실을 처음 발굴해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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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나 베트남 유학생 구수정(호찌민대 대학원 석사과정)씨는 베트남 정부가 1980년대 초에 민간인 학살 피해실태를 조사한 '남베트남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이라는 문건을 입수했다. 베트남 정부가 추산한 희생자만도 5천 명이었다. 베트남전에서 산화한 한국군 전사자가 5천 명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군이 학살한 민간인이 5천 명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구씨는 베트남 정부의 통계가 과장되었기를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동료들과 함께 한국군이 이른바 '베트콩 평정작전'을 벌였던 중부 5개성(카인호아, 빈딘, 푸옌, 꽝응아이, 꽝남)의 마을을 돌며 증언을 수집했다. 문서 내용은 사실이었다. 현장조사를 할수록 한국군에 희생된 마을과 사상자가 늘었다.

<한겨레21> 통신원이었던 구씨는 1999년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처음 알렸다. 이후 <한겨레21>은 1년 넘게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그의 대한 사죄운동인 '미안해요 베트남'에 관한 기사를 연재했다. 구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에서 80여 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으며, 9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반향

한국 정부와 민간 분야 모두에서 상반된 두 가지 반향이 나타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성명을 내어 "(대통령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민간 분야에서도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진보민주 세력을 중심으로 베트남 진실위원회와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등이 꾸려지면서 평화운동으로 발전됐다. 특히 전쟁 피해자인 일본군위안부 출신 고 문명금, 김옥주 할머니의 후원금을 종잣돈으로 설립된 평화박물관은 200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에서 어린이도서관 건립, 장학금 지원 사업을 벌였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였다.

한국의 ‘월남 파병용사 만남의 장’에 설치되었다가 해체된 무릎 꿇린 베트콩 실물 모형(위 왼쪽)과 사진가 이재갑씨가 찍은 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사진들(위 오른쪽)은 하나의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월남 파병용사 만남의 장’에 설치되었다가 해체된 무릎 꿇린 베트콩 실물 모형(위 왼쪽)과 사진가 이재갑씨가 찍은 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사진들(위 오른쪽)은 하나의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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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을 '구국의 십자군 전쟁'으로 간주했던 참전군인에게 민간인 학살 사건은 당혹스런 '불편한 진실'이었다. 특히 함께 제기된 '용병' 논란은 참전군인들에게 당혹을 넘어 분노를 촉발했다. 2000년대 들어 참전군인 단체를 중심으로 '월남 참전기념탑' 설립 붐이 이어졌다.

2008년에는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14만㎡ 부지에 180억 원을 들여 '월남 파병용사 만남의 장'이라는 안보체험장이 조성되었다. 오음리는 파월 장병들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6차례에 걸쳐 한 달씩 생존교육을 받은 훈련장(교육대)이 있던 곳이다. 관광자원이라고 재현해놓은 구찌 터널의 끝에 한국군이 베트콩들을 무릎 꿇려 놓고 총을 겨누고 있는 실물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가 베트남 정부의 항의를 받고 슬며시 철거하기도 했다.

한국군 해병여단은 1968년 2월25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의 전략촌인 하미 마을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난데없이 기관총과 수류탄을 퍼부었다. 대부분이 노인과 어린이였던 민간인 135명이 사망한 '하미 학살'이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2000년에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 마을에 3만 달러를 기탁해 위령비를 세웠다. 비록 위령비 문안을 둘러싸고 주민들과 갈등을 빚어 비문이 가려진 '반쪽짜리 위령비'가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2013년 한국인들이 처음 위령제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가 60개인데 한국의 참전탑과 기념비는 100개가 넘는다. 참전전우회 각 시-군 지부별로 한 곳씩만 있어도 200개가 넘으니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문제는 남의 나라에 가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 과연 기념할 만한 일이냐는 것이다. 구 박사는 "베트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전쟁을 기념하지 않는데, 한국은 패전하고서도 전쟁을 기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지적한다.

김대중 정부가 뿌린 '화해의 씨앗'과 ODA 20억 달러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념 전쟁'과 '기억 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과 베트남이 맺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정부가 뿌린 '화해의 씨앗'은 1998년과 2001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표명한 유감과 사과였다.

호찌민시에서 광고사업을 하고 있는 최덕영씨는 베트남을 방문한 역대 대통령들을 교민 리셉션에서 만났다. 최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있었기에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전국 학교의 책걸상과 칠판을 바꾸었고, 이것이 베트남과 경제협력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베트남의 사회경제개발전략 비전(2011~2020)과 한국이 지원하는 유상차관 누적 총액 상위 10개국 현황(2014년 기준). 베트남은 유무상을 다 합쳐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를 가장 많이 받는 국가로 한국의 맞춤형 ODA 전략이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트남의 사회경제개발전략 비전(2011~2020)과 한국이 지원하는 유상차관 누적 총액 상위 10개국 현황(2014년 기준). 베트남은 유무상을 다 합쳐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를 가장 많이 받는 국가로 한국의 맞춤형 ODA 전략이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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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적인 한-베 관계를 드러내는 지표는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이다. ODA를 관장하는 국무조정실의 박장호 개발협력정책관은 "한국과 베트남 정부 관계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누적총액은 20억 달러를 넘었다. 한국 정부가 지난 1987년 개발도상국 원조를 위해 EDCF를 설치한 이후 특정 국가에 대한 원조 총액이 20억 달러를 넘은 것은 처음이다.

국무조정실과 수출입은행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에 대한 유상원조 총액(2014년 승인기준)은 2조2662억 원(1995~2014년)으로 20억1천만 달러를 넘었다. 이는 한국의 유상원조 총누적액 11조6478억 원의 19.5%로 52개 원조대상국 가운데서 압도적 1위에 해당된다. 2위인 방글라데시(9465억 원, 8.1%)보다 2.4배가 더 많다. 원조를 받는 베트남의 입장에서도 한국은 일본에 이어 두 번째 큰손(원조 공여국)이다.

한국의 ODA가 베트남에 집중된 까닭

한국의 ODA는 왜 이렇게 베트남에 집중된 것일까? 한국-베트남 간의 교역규모와 유상차관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박장호 정책관은 "우리나라의 ODA는 지리적으로 근접한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는데 베트남은 ASEAN 국가 중에서도 경제협력 및 교역 규모가 크기에 유상차관 규모도 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베트남은 한국의 공적원조와 발전경험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준비된 개발도상국'이다. 한국 정부의 '베트남 협력전략'(2011-2015년)도 베트남의 개발수요를 바탕으로 한국의 발전경험과 장점을 연계함으로써 원조효과를 제고하는 데 중점을 둔다. 베트남은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2009년 1인당 GNI가 1010 달러를 기록해 중저소득국(LMIC)에 진입했다. 또 교육열이 높아 성인 문자해독률은 95% 수준이고, 빈곤율은 2%선까지 떨어졌다.

한-베 관계의 SWAT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최빈국에서 선진공여국으로 단기간에 발전한 경험을 갖고 있다. 또 비교적 근래에 개도국으로서 발전 경험을 갖고 있어 진정성 있는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 '강점'이다. 또한 한국의 개발경험과 잠재력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높은 관심,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분야와 베트남 정부의 ODA 수원(受援) 전략과의 유사성 등이 양국에 '기회'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경우, 교육의 질이 기업의 요구 수준보다 낮다. 베트남이 현대화된 산업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직업훈련 시설의 확충과 고숙련 인력 양성을 위한 장기교육 프로그램의 확대가 시급하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진단이다. 한국 정부의 ODA가 고속도로, 교량, 상하수도 건설 같은 인프라 구축과 교육 및 직업학교 지원에 집중되는 배경이다.

최근 진행 중인 ODA 프로젝트를 보면 ▲ 한-베 직업기술대학 건립사업(377억 원, 2008~2015년) ▲ 하노이 약학대학 건립사업(485억 원, 2014~2018년) ▲ 한-베 친선 IT대학 4년제 승격 지원사업(58.2억 원, 2013-2015년) ▲ 한-베 산업기술대학 3차 지원사업 (67.2억 원, 2014~2016년) ▲ 한-베 과학기술연구원(V-KIST) 설립 지원사업(392억 원, 2014~2017년) 등이다.

민간 차원의 교육 지원사업도 활발

호찌민시 투득과학기술대를 20년간 후원해온 이충범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응웬 티 리 총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및 교직원들과 함께 했다.
 호찌민시 투득과학기술대를 20년간 후원해온 이충범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응웬 티 리 총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및 교직원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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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차원에서 가장 활발한 분야도 교육 지원사업이다. 정해 한-베우호협회 이사장인 이충범 변호사는 2013년 9월 호찌민시의 투득기술대학을 20년 넘게 후원해온 공로로 베트남 국가주석이 수여하는 우의훈장을 받았다. 우의훈장은 베트남과 다른 나라의 우호관계에 큰 도움을 준 외국단체나 개인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이다. 응웬 티 리 투득기술대 총장에 따르면, 이 변호사는 교육분야에서 우의훈장을 받은 두 번째 외국인이라고 한다.

이충범 변호사는 1992년 한-베 수교 6개월 전에 우연히 베트남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라이 따이한(베트남에서 태어난 한국인 혼혈아) 실정을 알게 되어 투득기술대 산하에 직업훈련시설인 베-한 정해기술학교를 설립해 지원했다. 이후 1996년에 정식 기숙학교로 베-한 정해기술학교를 설립해 개인 돈과 재단 기부금으로 지난 20년간 200만 달러(기술장비와 컴퓨터 등 현물 포함)를 지원해 왔다.

호찌민 시립대학인 투득대는 한국의 폴리텍대학과 비슷한 과학기술대학으로 3년제(회계, 경영, 기계 등 11개 학과)와 2년제 전문대(관광, 한국어, 비서 등 15개 학과) 과정으로 운영된다. 현재 교직원은 300여 명, 재학생은 8천 명이다. 다른 대학과의 차이점을 묻자, 응웬 티 리 총장은 "기업과의 산학협력이 활발하고 한국어학과가 설치돼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밝힌다. 영남대 등 자매결연 대학들과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한국 유학 목적도 있지만 한국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다. 이 대학 한국어학과장은 "국내 기업에 취업하면 월급이 200~300달러인데 한국 기업은 500달러, 특히 삼성전자는 1천 달러 수준"이라고 귀띔한다. 총장은 "호찌민시와 근교의 많은 기업들이 전문기술 인력을 구하기 위해 우리 학교를 찾는다"고 덧붙인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라이 따이한들에게 직업훈련을 시켜 자활을 돕기 위해 시작한 민간 차원의 교육지원이 한-베 우호관계로 발전한 모범적인 사례다. 이 변호사는 "직업기술센터로 시작한 학교가 전문대를 거쳐 20년 만에 3년제 과학기술대학으로 성장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면서 "초기에 김우중 대우 회장이 학교 기자재를 지원해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종전 40년에도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이념 전쟁'과 '기억 투쟁'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의 저자인 윤충로 박사는 최근 '한국의 베트남전쟁 기억의 변화와 재구성'이라는 논문에서 이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 투쟁'이 '공식 기억'과 '대항 기억'의 투쟁으로 대립하며 냉전의 사회적 실재를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사회의 진실규명-평화운동이 '반공-발전을 위한 전쟁'으로 정형화된 '공식 기억'을 해체했지만, 이에 반발한 참전군인들이 공식 기억을 더 공고히 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이 종전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우리 안의 냉전' 속에서 여전히 '이념 전쟁'과 '기억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윤 박사는 "탈국가적 전쟁기억, 생명권·인권·평화에 바탕을 둔 전쟁에 대한 인식의 확장은 사회적 냉전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월은 정의의 편'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기억 투쟁'의 현장에서 확인된다.

구수정 박사가 본부장을 맡고 있는 사회적 기업 ‘아맙’의 다음카페 첫 화면.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통해 번 돈으로 평화재단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 미안해요 베트남. 구수정 박사가 본부장을 맡고 있는 사회적 기업 ‘아맙’의 다음카페 첫 화면.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통해 번 돈으로 평화재단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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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정 박사는 한국인으로서 어렵게 베트남 국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교직을 포기하고 호찌민에 사회적 기업 '아맙'(http://cafe.daum.net/doanhnhanxahoi/)을 설립해 4년째 운영하고 있다. 아맙의 주요 사업은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이다. 공정여행은 주로 시민사회 및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참여하는 베트남 평화기행이다. 그에게 평화는 곧 '듣는 것'이다. 그가 학교 대신에 현장을 택한 것도 베트남에는 아직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평화재단을 꾸리는 것이다.

"평화재단의 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카이브 작업이다. 증언을 채록하기 위해 내가 만났던 피해자의 85% 이상이 사망했다. 학살 당시 생존자는 대부분 아기였거나 노인이었다. 노인들은 다 죽었고, 살아있는 15% 중에는 학살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생후 6개월 된 아기한테 무슨 기억이 있겠나. 그래서 기록과 아카이브 작업이 중요하다."

화천군 오음리 ‘월남 파병용사 만남의 장’은 모든 시설 관람비와 주차비도 무료다. 그래도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반면에 미국의 전쟁 증거를 쌓아둔 전쟁증적박물관은 연간 50만명의 외국인 관람객이 찾을 만큼 인기가 있다. 제주 곶자왈 작은학교의 강예원 학생이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와 쓴 소감문(위 오른쪽).
 화천군 오음리 ‘월남 파병용사 만남의 장’은 모든 시설 관람비와 주차비도 무료다. 그래도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반면에 미국의 전쟁 증거를 쌓아둔 전쟁증적박물관은 연간 50만명의 외국인 관람객이 찾을 만큼 인기가 있다. 제주 곶자왈 작은학교의 강예원 학생이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와 쓴 소감문(위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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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평화기행을 온 제주 곶자왈 작은학교(주말과 방학 중에 평화와 환경, 나눔과 연대의 가치를 담은 체험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되는 틈새학교-기자주) 학생들이 평화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그는 같은 대답을 했다. '듣는 것'이라고. 구 박사의 안내로 전쟁박물관을 관람한 강예원 학생(중1)은 그때 전승받은 '듣는 것'을 토대로 '전쟁은 기념 아니고 기억하는 것'(http://cafe.naver.com/gotjawal/6509)이라며 이렇게 기록했다.

"베트남 전쟁.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죽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된다.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면 다시 반복되게 돼 버릴 수도 있다. 꼭 이 사건들을 기억할 것이다."(강예원, 2015. 1. 16)

세월은 정의의 편이다

예원이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 '피스보트'(http://omn.kr/51b7)에서 내가 만난 적이 있는 학생이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파월 장병들은 이제 대부분이 60, 70대 노인들이다. 고목나무에 새싹이 돋아나듯, 예원이의 기억에서 생명순환의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느낀다면 감상적인 것일까.

"세계평화의 역사적인 현장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서 조성했다는 오음리 안보체험관은 모든 시설 관람비와 주차비도 무료다. 그래도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오죽하면 지역신문이 사설에서 "방문객이 하루 평균 42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보니 숙박시설 등을 통한 수입은 고작 1550여 만 원인데 인건비와 관리비 등 연평균 지출은 3억2천여 만 원에 달하고 있다"(강원일보, 2013년 1월 29일)고 지적할 정도다.

후인 응옥 번 전쟁증적박물관장에 따르면, 박물관은 연간 관람객이 70만 명을 넘고 그중 70%는 외국인들이다. 2012년부터 3년간 연속적으로 '트립 어드바이저'로부터 세계와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박물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말 현재 1천100만 명을 넘는 누적 방문객 중에는 남아공 대통령과 스웨덴 총리 그리고 곶자왈 학생들이 있다.

국가가 독점해온 베트남전에 대한 '공식 기억'을 지키려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세월은 정의의 편이다.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이해 하노이의 호찌민박물관을 찾은 유치원생들이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다.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이해 하노이의 호찌민박물관을 찾은 유치원생들이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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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베트남전, #구수정, #전쟁박물관, #ODA, #투득기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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