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활용이 유려한 몇몇 공포 영화들이 있다. 단박에 떠오르는 건 제임스 완 감독의 <쏘우>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큐브>다. 두 영화 모두 밀폐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2일 개봉한 영화 <버닝 브라이트>도 완벽히 밀폐된 집 안에서 벌어지는 공포물이라는 데서 기존의 공간 활용형 공포 영화 선상에 놓인다. 공포의 대상으로 귀신이나 유령의 존재를 짐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정일 텐데, 의외로 이 집 안에서 활약하는 공포의 실체는 2주 굶은 식인 호랑이다.

보통 공포 영화에서 갇힌 공간은 피해자 역할에 놓인 주인공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가두면서 형성된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고군분투를 제대로 보여주는 주인공 켈리 테일러(브리아나 에비건 분)가 호랑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여러 방문을 연쇄적으로 닫으며 폐쇄적 상황을 만들고, 그로써 안전을 확보한다.

문제는 호랑이의 발길질 서너 번이면 문은 쉽게 파괴되며, 켈리는 또다시 자신을 숨길 공간을 탐색해야 하는 데 있다.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의 공간은 말 그대로 꽉 막힌 공간이다. 탈출을 위한 비상구는 주인공의 기지로 개척하지 않는 이상 물리적으로 담보돼 있지 않다. 그렇기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켈리가 위험천만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영화의 주 재미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12일 개봉한 영화 <버닝 브라이트>의 한 장면. 영화 <버닝 브라이트>의 주인공 켈리 테일러 역을 맡은 브리아나 에비건

▲ 12일 개봉한 영화 <버닝 브라이트>의 한 장면. 영화 <버닝 브라이트>의 주인공 켈리 테일러 역을 맡은 브리아나 에비건 ⓒ SOBINI FILMS


뛰어난 상황 설정, 영화 주인공보다 먼저 공포를 느껴라

<버닝 브라이트>는 방 개수가 많은 2층 집, 무시무시한 호랑이,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만으로 채워지고 있다. 저비용 고효율의 공포 영화인 셈이다. 귓가를 울리는 호랑이의 그르렁 소리와 그림자 형상은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게  한다. 연출을 맡은 카를로스 브룩스 감독은 '공포와 섹시'의 관계를 알고 있는듯 하다. 호랑이를 전면에 등장시켜 주인공과의 혈투를 그려내기보다는 위협을 느끼는 주인공의 표정과 행동에 더 집중한다.

영화의 목적은 관객이 켈리의 상황을 생생하게 체감케 하는 데 있다. 결과부터 말하면 영화는 그 목적을 웬만큼은 달성한다. 극 초반 켈리의 미숙한 대처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지점들이 있지만, 켈리와 같은 상황 안에 처해있다고 가정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감정적 이해가 앞서니 넘어갈 만하다.

영화는 이처럼 위험천만한 상황 안에 감정 몰입을 부추길만한 단 한 명의 주인공을 던져 놓음으로써, 관객도 모험에 참여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주인공의 상황에 동화되는 것은 기본이며, 주인공이 놀라기도 전에 관객이 먼저 놀라는 독특한 체험도 가능하다.

반복되는 호랑이와 인간의 추격전 양상이 어느 순간부터는 다소 고루해진다. 이는 추격 양상이 비슷한 모양으로 반복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켈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늘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켈리의 신경쇠약을 일으키는 핵심 요소는 터울이 많이 나 보이는 동생 톰이다. 어머니를 잃고 자폐증을 앓는 아이인 동생 톰은 다급한 켈리와 달리 여유롭게 호랑이의 위협을 피하면서 켈리의 고투를 오버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종종 몰입은 이런 부분에서 깨진다.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도 켈리에게는 큰 도움이 될 텐데, 철부지 동생은 여기 저기 돌아다녀 누나의 속을, 관객의 애간장을 태운다. 첫 탈출을 감행하며 호랑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켈리가 톰을 구하기 위해 제 발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12일 개봉한 영화 <버닝 브라이트>의 한 장면 영화 안에서 공포의 실체로 활약한 식인 호랑이의 모습.

▲ 12일 개봉한 영화 <버닝 브라이트>의 한 장면 영화 안에서 공포의 실체로 활약한 식인 호랑이의 모습. ⓒ SOBINI FILMS


반전 장치의 아쉬움, 그래도 무섭다

영화는 나름의 반전 장치를 마련해 두었지만 생각만큼 효용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오프닝 시퀀스와 에필로그에 제시한 흐릿한 이미지들의 교차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바람의 이동인지, 파도의 형상인지 정확히 분간이 어려운 흐릿한 이미지를 스산한 바람 소리 위에 놓는다. 앵글이 빠지면 소용돌이 모양의 바다가 등장하고, 이는 다음 장면의 자동차 바퀴 이미지와 교차된다. 이후 다시 장면이 바뀔 때에는 자동차 바퀴에 켈리의 발을 오버랩하면서 운동 이미지를 만든다.

이를 해석하면 소용돌이처럼 무언가를 강하게 빨아들일 만한 위험이 켈리에게로 옮겨갔다는 의미다. 호랑이가 집을 어슬렁대기 시작하는 건 켈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이미지며, 호랑이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자동차(의붓아버지 조니의 차)는 이 모험 안에 또 다른 음모가 도사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집 안으로 들어온 호랑이는 켈리 가족 안으로 들어온 의붓아버지를 상징한다. 둘의 침입 목적은 켈리 가족을 파괴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라는 데서 동일하다. 굶주린 호랑이는 식욕을, 의붓아버지는 물욕을 드러냄으로써 침입의 동기를 완성하는데, 결말에서 둘의 욕구는 한바탕 충돌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식인 호랑이의 이름은 '루시퍼'다. 성서에서는 루시퍼를 '빛을 운반하는 악마'로 정의하고 있다. 의도된 작명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루시퍼는 정말 악마에 가깝게 묘사됐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방도인지 <라이프 오브 파이>정도 급의 우수한 움직임은 볼 수는 없었지만,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앞발을 뻗는 루시퍼는 켈리와 관객을 혼비백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핸드헬드로 촬영된 장면들은 긴박감을 훌륭히 조성했고, 실제 상황처럼 열연한 켈리 역의 브라이나 에비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반전이 관객을 뜨악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돼버린 추격전, 공포 영화의 관습을 크게 뛰어넘지 못하는 점 등을 제외하면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재미는 느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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