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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54일만에 전격 사임한 조지 엔트위슬 BBC 사장
 취임 54일만에 전격 사임한 조지 엔트위슬 BBC 사장
ⓒ BBC인터넷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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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공영방송인 BBC가 엄청난 스캔들과 방송 사고로 연일 휘청거리고 있다. 급기야 지난 10일(현지시간) 취임 2개월도 되지 않은 조지 엔트위슬(49) BBC 신임 사장이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가장 떳떳하고 명예로운 일은 사건들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BBC간판 진행자의 경악할 만한 30년간의 범죄  

그렇다면 무엇이 취임 54일 밖에 되지 않은 신임 사장을 사임하게 만든 것일까?

BBC에 불어닥친 지난 몇 주간의 악몽 같은 스캔들의 전말은 이러하다. 수십 년 동안 영국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BBC의 간판 진행자이자,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하사받았던 고 지미 새빌(2011년 사망)의 경악할 만한 범죄 행적이 만천 하에 드러났다. 새빌은 인기 DJ 출신으로 젊은 시절 BBC에 의해 픽업된 후, 30년 넘게 팝 음악 방송을 비롯한 다수의 인기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특히 그는 BBC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까지 맡으며 BBC의 얼굴로까지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최고 인기를 누리던 30여 년 동안 상습적으로 아동과 청소년들을 성폭행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경쟁사 프로그램을 통해 밝혀졌다.

특히 새빌은 자신의 일터였던 BBC 텔레비전센터 출연자 대기실을 포함한 여러 공적인 장소들에서 자신의 지위와 대중적 인기를 이용해 아동과 청소년 출연자들을 성폭행해 왔고, 그 사실들을 강압적으로 은폐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현재 그 피해자만도 무려 3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아동 성폭행을 일삼으면서 그 기간 동안 어린이 보호 캠페인 등 위선적인 자선 활동 통해 영국 국민들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점이다.

작고한 BBC간판 진행자 지미 새빌의 아동 성폭행 은폐로 BBC가 논란을 겪고 있다.
 작고한 BBC간판 진행자 지미 새빌의 아동 성폭행 은폐로 BBC가 논란을 겪고 있다.
ⓒ BBC인터넷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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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빌의 주활동 무대였던 BBC는 이 스캔들로 인해 지난 10월부터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지난 10월 3일, BBC 경쟁사인 ITV는 새빌의 아동 성폭행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지미 새빌에 대한 또 다른 면>이란 다큐멘터리를 방송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방송이 나간 이후 '어떻게 BBC 내부에선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상황을 몰랐을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 다른 사실도 드러났다. BBC는 지난 10월 22일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파노라마>를 통해 "작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BBC의 다른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뉴스나잇>에서 이미 지미 새빌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에 대한 의혹을 다룬 내용을 제작했으나, 당시 데스크였던 피터 리폰(10월 22일 사임)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서 이 방송이 불방됐다"고 뒤늦게 실토했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영국 사회에선 희생자들을 위한 본격적 조사와 함께 제2의 새빌이 유력 정치, 사회, 문화계 인사들 가운데 더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 흘러나왔다. 그런 가운데 지난 2일 BBC <뉴스나잇>은 "집권 여당인 보수당의 유력 원로 정치인 역시 새빌과 유사한 시기 아동 성폭행에 가담했다"고 보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며칠 만에 그 보도가 오보임이 드러나면서 다시 한 번 대중적 비난과 함께 BBC 저널리즘 신뢰도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이 두 사건으로 급기야 BBC 저널리즘의 편집 총책임자인 조지 엔트위슬 사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 것이다.

독립적인 저널리즘을 위한 사장의 역할과 책임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지 엔트위슬 사장의 행보다. 사실 그는 작년 12월 <뉴스나잇>의 새빌 스캔들 불방 사건 당시 BBC의 모든 방송 콘텐츠를 최종 책임지는 영상본부장(VISION)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헬렌 보덴 뉴스본부장의 증언에 의하면 <뉴스나잇>의 새빌 취재 건 역시 간단하게나마 그에게 보고되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엔트위슬 사장 은 BBC가 자랑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뉴스나잇>의 에디터 출신이었기 때문에 <뉴스나잇> 팀 내부(데스크)의 불방 결정 역시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임 전 그의 의회 발언을 보면 "작년 12월 당시 <뉴스나잇>의 취재 내용은 어렴풋이 인지했으나 큰 관심도 어떠한 영향력도 가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특히 본인이 전직 <뉴스나잇> 데스크 출신으로 탐사보도 부분에서 제작진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잘 아는 입장이다 보니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발언을 영국 시청자들 대부분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당시 데스크였던 피터 리폰이 가장 먼저 책임지고 사임하게 됐던 것.

결정적으로 조지 앤트위슬 사장을 BBC를 떠나도록 만든 사건은 여당 정치인을 직접 겨냥한 <뉴스나잇> 2일 방송이었다. 이 방송 후 데이비드 카메론 영국 총리를 비롯한 집권 여당 측에서 거세게 반발했으며, 결국 그 보도 내용이 오보임이 밝혀지면서 곧바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를 물러나게 됐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조지 엔트위슬 사장이 이번에도 이 방송 내용과 논란이 된 상황을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은 실제 사장의 행적을 추적해 당시 그가 새빌 스캔들의 희생자들을 위한 외부 스케줄을 소화하는 등 방송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결국 보수당 출신인 로드 패튼 BBC 트러스트(BBC 규제기구) 의장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BBC 저널리즘 위기"라며 신임 사장의 목을 조였고, 여기에 "사장이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편성에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도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BBC 내 최고의 인물로 큰 기대를 모았던 조지 엔트위슬 사장은 BBC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낙마하는 인물이 됐다.

BBC 사장과는 너무 다른 KBS·MBC

이번 BBC 사장 사임은 우리나라 공영방송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KBS의 경우 이사회가 길환영 부사장을 사장 후보로 임명제청했지만, KBS구성원들과 야당, 시민단체들은 "편파 방송의 책임자"라고 그의 사장 선임에 반발하고 있다. MBC 김재철 사장 역시 친정부적인 방송과 도덕적인 문제로 MBC노조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으로부터 거센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BBC의 경우 논란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사실에 어긋나는 보도를 하게 될 경우에 사장부터 데스크까지 모두 회피하지 않고 전면에 나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저널리즘의 핵심인 공정성과 독립성을 최우선으로 지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이해와 요구보다는 방송사 전체의 편집권적 책임을 거의 무한대로 지는 BBC 사장과 국민 대다수와 조직 구성원들의 입장은 무시한 채 정권의 입맛에 따라 편집권을 행사하며 자리보전에 몰두하는 우리의 공영방송 사장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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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문화연구자. 지역의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함. 10여년 전 유학시절 <오마이뉴스> 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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