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5 20:50최종 업데이트 23.01.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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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일본 국회에서 시정방침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중요한 이웃 나라인 한국과는 국교 정상화 이후 우호협력관계를 기초로 일한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긴밀히 의사소통해 나가겠습니다."

지난 23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일본 통상국회(정기국회) 시정방침연설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언급했다.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라는 표현은 한국인들이 사과·배상을 요구하는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한국인들이 식민지배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일본과 협력하는 상태가 그가 말하는 건전한 관계다. 이 표현은 미쓰비시 및 일본제철의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를 봉합하고 한일관계를 그런 관계로 되돌리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건전한 관계'를 강조하는 일본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점은 시정방침연설 나흘 전의 일로도 증명된다. 설날 연휴 직전인 19일, 기시다 내각은 한국 동해상의 니가타현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추천서를 제출했다. 군함도 못지않은 한국인 강제징용 현장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사도광산을 운영한 전범기업은 징용 문제와 관련해 계속 거론되는 미쓰비시그룹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에 발간한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보고서의 표지에도 '미쓰비시광업(주) 사도광산을 중심으로'라는 부제목이 딸려 있다. 사도광산 문제는 곧 미쓰비시 문제다.

미쓰비시 강제징용으로 심신의 상처를 입고 일평생 한을 품은 이들을 위한 소송이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고, 이 문제를 봉합하고자 한국의 윤석열 정부와 일본의 기시다 내각이 공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기업도 아닌 미쓰비시의 강제징용 현장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것이 과연 인간적인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등재 신청 다음 날인 20일에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대신이 기자회견 형식을 빌려 입장을 밝혔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재된 회견문에서 그는 "어쨌든 우리나라로서는 사도섬 광산의 세계유산 등록을 향해, 그 문화유산으로서의 훌륭한 가치가 평가되도록 한국을 포함한 관계국과의 사이에서 계속해서 정중하게 논의를 해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한국과 정중한 논의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지만, 세계유산 등재를 실현시키고 사도광산의 훌륭한 가치가 평가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그 논의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쓰비시그룹과 사도광산이 한국인들에게 끼친 고통과 그로 인해 전개되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일부만 떼어내 역사적 평가 시도하는 상식 밖의 행동
 

9일(현지시간) 유럽을 순방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중앙)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과 함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복구 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외신들은 이날 기시다 총리가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사도광산에 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 연합뉴스

 
지금 일본 정부는 국제적 비판을 의식해, 무신정권인 도쿠가와막부의 수도가 에도(도쿄)에 있었던 에도시대(1603~1868)에 국한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강제징용이 있었던 시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을 근거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이다. 역사의 일부만 떼어내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상식 밖의 행동이다.

지난 9일 기시다 총리는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해 사도광산 등재 신청에 관한 협조를 당부했다. 10일 자 <로이터통신> 일본어판 기사 '수상, 사도광산 등록 설명'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오드레 아줄레 사무총장은 유네스코에 대한 지원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본과의 협력을 일층 강화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이 되는 데에 흠결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일본의 후원 문제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일본은 한국인들의 상처를 무시하고 또 비상식적인 방법을 동원해가며 사도광산의 '훌륭한 가치'를 선전하고 있다. 그곳에서 비인간적인 노예노동이 자행됐으며, 노예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도 지급되지 않은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보고서는 "최소한 1140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라며 "이들의 급여와 저축, 각종 보험금을 본인에게 지불하지 않고 공탁했다"고 지적한다. 1140명 외의 나머지 피해자들이라고 해서 임금을 제대로 받은 것은 아니다. 1140명에 대한 공탁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91년 6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1945년 9월 1일 자 일본 정부 문서 '조선인 집단이입 노동자 등의 긴급조치에 관한 건'은 "임금 지급에 관하여는 당장의 용돈으로서 필요한 정도의 현금을 본인에게 건네주고, 잔금을 각인 명의의 저금으로 하여 사업주가 보관해둘 것", "이 조치는 선내(鮮內)와의 통신 두절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하고, 장차 저금은 반드시 본인에게 준다는 뜻을 철저히 주지시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에서 집단 유입된 징용 피해자들에 관한 처리 지침을 담은 이 문서는 광역 지방자치단체들로 발송됐다. 조선 내부와의 통신 두절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한국인 월급을 사업주가 보관해두라는 지시가 일본 전국에 보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체불 임금이 법원에 공탁됐다. 사도광산 공탁금 역시 그렇게 발생했다.

2021년 12월 국내에 보도된 니가타현 공문서 '귀국 조선인에 대한 미불임금채무 등에 관한 조사에 관해'에 따르면, 1140명에 대한 공탁금은 시효완성을 이유로 1959년 5월 11일 국고에 들어갔다.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연락도 해주지 않은 채, 찾아가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처리했던 것이다.

하야시 외무대신은 '훌륭한 가치'를 운운했지만, 이처럼 사도광산 강제징용에서 발견되는 것은 미쓰비시와 일본 정부의 '반인간적 가치'뿐이다. 이런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한국인들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일이다. 한마디 유감 표명조차 없는 것은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점의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대응 수위 낮춘 윤석열 정부
 

2022년 10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추계 공관장 신임장 수여식을 마친 뒤 간담회장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일본이 사도광산 문제로 한국인들을 우롱하고 미쓰비시 피해자들을 조롱하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가 추천서를 제출한 이튿날인 20일, 외교부는 대변인 논평을 내고 일본 공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그런데 대변인 논평의 내용이 상당히 이상하다.

외교부 공공문화외교국이 작성한 이 논평은 "우리 정부는 2015년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관련 후속 조치가 충실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유사한 배경의 사도광산을 또다시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라며 "우리 정부는 일본 근대산업시설 등재 시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부터 조속히 이행할 것을 재차 촉구한다"라고 말했다.

사도광산 등재 신청에 유감을 표하면서, 2015년에 등재된 군함도 등에서 강제징용이 있었음을 알리겠다고 약속한 것부터 지키라고 촉구했다. 사도광산 등재 신청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지 않고 군함도 등에 대한 후속 조치를 이행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 논평이었던 것이다.

일본 내각이 사도광산을 추천하기로 결정한 날인 작년 1월 28일, 외교부는 대변인 논평 발표가 아닌 대변인 성명 발표라는 보다 명료한 의사표시 방식을 선택했다. 이때의 외교부 성명은 "우리 측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1. 28(금) 제2차 세계대전 시 한국인 강제노역 피해 현장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추진키로 결정한 것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이러한 시도를 중단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라고 경고했다.

2022년에는 등재 추진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던 외교부가 2023년에는 군함도 등에 대한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엉뚱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렇게 된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박진 외교부 장관의 역할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작년 1월 28일의 외교부 성명은 하야시 외무대신을 불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외무성 홈페이지에 따르면, 하야시는 기자의 질문에 답할 때 "한국 측의 주장에 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라고 한 뒤 잠시 중언부언하다가 "저쪽의 입장, 저쪽의 하실 말씀을, 이쪽의 입장에 기초해 반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쪽·저쪽이란 표현을 써가며 '반론 중'이라고 답했던 하야시 대신이 이달 20일에는 사도광산의 훌륭한 가치를 운운한 뒤 '한국 등과 정중하게 논의를 이어가겠다'며 공손하게 답했다. 작년처럼 '저쪽에 대해 반론 중'이라고 답하지 않고 '정중하게 논의를 하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와 한국 외교부가 대응 수위를 낮춘 데 대한 답례로 볼 수도 있다.

기시다 내각은 미쓰비시 강제징용 문제를 봉합하고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강제징용 봉합을 위해서라도 사도광산 문제를 잠시 접어둘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세계유산 등재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의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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