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0 05:13최종 업데이트 22.11.10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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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4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이 브라질에서 열린 브릭스 11차 정상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최근 한 달 사이 국제 뉴스에 자주 등장한 네 나라다. 길게는 수년, 짧게는 수개월 사이 네 나라가 국제무대에 비친 모습들을 보면, 세기 초 전 세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당시와는 다소 딴판이었다.

이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과 함께 신흥 경제국 공동체 '브릭스'(BRICS)를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브릭스 5개국 가운데 남아공은 위 네 나라에 비해 경제규모, 인구, 국토면적 등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실제 골드만삭스의 애널리스트 짐 오닐이 처음 주목했던 미래의 신흥 경제강국은 남아공을 제외한 브릭(BRIC) 네 나라였다. 훗날 영국의 재무차관을 지냈던 짐 오닐의 예측은 적절했고, 현재 네 나라는 전 세계 국토면적과 인구 규모 10위권이면서 동시에 경제규모 10위권에 진입해 있다.

국토면적과 인구규모 그리고 경제 10위권 안에 모두 들어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이들 네 나라뿐이다. 이들은 대규모 영토, 자원, 인력을 앞세워 전 세계 자본을 빨아들이면서, 공장과 시장으로의 매력도 동시에 갖추었다.

브릭 4개국은 문호를 열고 2010년 중국 대회부터 남아공을 정식 초청했다. 그 후 다수의 다른 국가들도 합류를 원하고 있다. 이미 이란, 아르헨티나가 가입 신청을 했고 사우디아라비아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튀르키예, 이집트도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이들에 합류할 국가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고 그에 따라 명칭도 달라질 것이다. 요컨대 브릭스는 닫힌 집합이 아니라 앞으로 확장일로를 걸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주요 7개국(G7)으로 불리는 '선진국형 경제 강국'에 버금가는 경제대국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10개국 또는 그 이상이 될, '확대된 브릭스'의 경제 규모는 십수년 내에 G7 수준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의 국제무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신흥 경제대국 클럽을 이끌 4인방은 바로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이다.

이미 올해 브릭 4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G7 일곱 나라 경제규모의 40%에 달한다. 2000년에 12%에 불과했던 점을 비교하면 일취월장이다. 과거 프랑스의 경제전문지 <레제코>는 2025년이면 이들 네 나라의 경제 규모가 세계 경제의 40%를 차지할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그 예측이 맞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수년 안에 이들 신흥 경제 대국의 국제사회 입김은 G7과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G7 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리더십이 한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 G10 또는 G11으로 확대를 고려하고 있다.

'하드 파워' 아닌 '소프트 파워'의 차이
 

1. 세계은행 발표 2021년 기준 2. 유엔 발표 2021 기준 (추정치) 3. 유엔통계국 발표 2022년 기준 4. 글로벌 파이어파워 발표 2022년 기준 ⓒ 임상훈


세계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명목 GDP 상위 12개국은 차례로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한국, 러시아, 브라질이다. 한국을 제외한 11개국이 G7 또는 브릭 회원국들이다.

이들은 세계 경제뿐 아니라 군사력 순위도 상위 그룹을 양분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고 여러모로 G7 국가들로서는 긴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G7국들과 브릭 4개국은 서로 앞뒤를 다투는 경제, 군사 대국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그룹 사이에는 이질적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

'선진국형 경제 강국' G7에 비해 이들 '신흥 경제 강국' 브릭은 인구, 국토, 자원, 경제, 군사력과 같은 '하드 파워'가 아닌 '소프트 파워'에서 여전히 차이를 보인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 의장을 지낸 조지프 나이는 이 개념을 고안하면서 국가의 힘은 '무력'뿐이 아닌 '매력'에서도 나온다고 강조한 바 있다.

영국의 컨설팅업체 '브랜드 파이낸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소프트 파워 지수 상위 10개국에 G7국가가 모두 합류한 반면, 브릭 국가 가운데서는 중국과 러시아만 포함돼 있다. 브라질과 인도는 각각 28위, 29위를 기록하고 있다(한국은 12위).
 

2022 글로벌 소프트 파워 지수 ⓒ 브랜드 파이낸스


영국의 또 다른 컨설팅업체 '포틀랜드 커뮤니케이션'이 발표한 2019년 소프트 파워 순위에서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G7 국가들이 모두 상위 11위 안에 속한 반면 중국, 브라질, 러시아는 각각 26, 27, 30위에 머물고 있다.

시민의 자유와 관련한 지표를 보면 차이는 더 확연하다. 미국의 싱크탱크 '프리덤하우스'의 자료에 따르면 2021년의 자유지수 3등급 가운데 G7 국가는 모두 '자유' 판정을 받았지만 브릭 국가 가운데서는 인도, 브라질만 '자유' 판정을, 러시아와 중국은 가장 낮은 '부자유' 판정을 받았다(한국은 '자유' 그룹 판정).

'국경없는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를 보면 두 그룹의 이질성은 더해진다. 2022년 자료에서 5개 등급 가운데 독일(16위), 캐나다(19위), 영국(24위), 프랑스(26위), 미국(42위)이 2등급을, 이탈리아(58위), 일본(71위)이 3등급을 받는 반면 브라질(110위), 인도(150위), 러시아(155위), 중국(175위)은 모두 최하위 5등급을 얻었다(한국(43위)은 2등급).

이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 국제사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브릭 국가들이 중점을 두어야 하는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등 브릭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국가 비전을 위해 소프트 파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수차례 중국의 소프트 파워 증대를 강조한 바 있으며 올해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국가의 문화 소프트 파워를 뚜렷하게 강화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역설했다. 하지만 중국의 소프트 파워가 시진핑 체제 들어 더 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네 나라의 모습

'소프트 파워'의 주창자 조지프 나이 교수는 저서에서 중국 정부의 '반 소프트 파워' 전략을 지적하고 있다. 중국 선박이 스카보로 해안에서 필리핀 선박을 내몰았을 때, 그들은 중국의 외딴 지역을 장악했지만 필리핀에서 중국의 소프트 파워가 감소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고 이웃나라 조지아, 우크라이나를 차례로 침공했다. 2022년 2월부터 러시아는 9개월째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며 핵 전술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러시아의 '매력'은 그만큼 하락한다.

브라질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체제에서 광대한 영역의 아마존 삼림이 파괴되는 현실을 겪어야 했다. 환경단체들에 따르면 최근 4년 동안 브라질 국토 내부의 아마존 삼림이 최대 20% 손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그 이유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되기까지 했고 그의 집권기에 브라질은 많은 국가들로부터 외면을 당해야 했다.

지난달 브라질 대선에서 승리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당선인은 승리를 확정지은 직후 아마존 삼림의 복구를 최우선 과제라고 선언했다. 다행히 국제사회는 이에 반응했고, 유럽의 최대 아마존 기금 공여국이었던 노르웨이는 그동안 중단됐던 지원금 재개를 발표했다.

지난 10월 30일 한국에서 있었던 이태원 참사 바로 다음 날, 인도의 구자라트 모르비에서는 다리가 무너져 최소 14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보행자 전용 현수교였던 해당 다리는 동시 수용 인원이 150명이었으나 사고 당시 500명이 동시에 올라서 있었다고 한다.

더 심각한 일은 해당 다리가 7개월 전부터 보수공사를 위해 폐쇄돼 있다가 사고 닷새 전에 재개장했다는 사실이다. 수개월의 보수작업 동안 공사의 핵심인 케이블은 교체하지 않고 다리 바닥만 손을 본 것으로 드러나 인도의 기반 시설 관리 부실이 또 한 번 도마에 오르게 됐다.

인도는 교량, 도로 등 기반 시설에 대한 안전의식 부재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2016년에는 동부 캘커타의 한 다리가 무너져 26명이 사망하기도 했으며 2011년에는 다르질링에서 30킬로 떨어진 북동부에서 역시 교량 붕괴로 3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지난 한 달여 시간, 매체에 자주 등장했던 이들 네 나라의 모습은 그들의 야심 찬 포부와 달리 지도력을 갖춘 국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최근 정권교체를 이룬 브라질은 국제무대로 복귀를 서두르고 있기는 하다. 한때 브라질을 세계 경제 8위까지 끌어 올리며 성장과 분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룰라의 기적'이 부활할지 지켜볼 일이다.

한국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1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태원 사고' 관련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총리실


조지프 나이 교수는 정보화 시대에 한 국가가 가장 얻기 힘든 희소 자원은 지하에서 캐내는 광물이 아니라 '신뢰'라는 자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 국가의 신뢰는 광물처럼 하루아침에 채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 누적된 구체적 행동들이 모였을 때 빛을 보는 자원이다.

물론 반대로 고갈되는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영구 반복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오늘날 영향력과 지도력을 갖춘 나라들은 하드 파워뿐 아니라 소프트 파워를 동시에 갖춘 나라들이다. 이것이 현재까지는 '선진국형 경제 강국'들과 '신흥 경제 강국'들의 차이다.

12개 경제 강국 가운데 유일하게 G7에도 브릭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 한국. 과연 우리가 앞으로 가게 될 길은 어느 쪽이 될까. 경제 강국 자리마저 위협을 받지는 않을까? 혹시 갈라져 있는 두 그룹을 잇는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

최근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워싱턴 포스트>가 던진 한국에 대한 질문에 미국 코네티컷대 동아시아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의외의 반응을 내놓았다. 이번 참사에 희생당한 외국인들의 면면을 보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이란 등 20여 개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

"그게 한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거예요.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있으면 친하게 지낸다는 거죠." 한국은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참사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최근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이태원 비극'은 공교롭게도 인도 다리 붕괴 사고 하루 전날 발생했다. 외신들의 두 사건 보도가 나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인도의 반복되는 기반 시설 부실로 인한 사고를 지적하듯, 외신들은 반복되는 우리 정부의 무능으로 인한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최고 수준의 무능한 정부를 목격한 나라였음에도(<가디언>), 삼풍 백화점 참사 이후 30년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워싱턴포스트>) 묻고 있다. 알렉시스 더든 교수의 이 말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는 전 세계인을 끌어당기는 뭔가 '쿨'한 것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책임감은 배가하지 못한 것 같다. 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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