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1 17:13최종 업데이트 22.11.0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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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고 유가족들이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을 찾아 이태원역 1번출구앞에 마련된 추모장소에서 헌화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 권우성

 
무겁게 내려앉은 30일 일요일 저녁 '세월호 세대'인 딸아이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수학여행 한번 제대로 가지 못했는데 이번에 또 우리냐고 눈물을 글썽였다. 진정 미안했다.

길거리에서 156명(1일 오전 11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발표 기준)이 압사당하는 대한민국. 기성세대인 내가 어떤 말로 그 죽음을 위로할 수 있으며 어떤 이유를 들어 변명할 수 있을까? 딸아이에게 미안했고 길거리에서 죽어간 청춘들에게 죄스러웠다. 거기 왜 갔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되묻고 싶다. 대체 이 나라 어디가 안전하냐고?


일요일 새벽 전해진 참상에 반쯤은 넋 나간 사람이 되었다. 소방 당국이 얼마나 빨리 출동했는지, 정부가 얼마나 기민하게 움직였는지, 현장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실시간 속보로 전달되었지만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을 수 있나?

가짜 뉴스이길 바랐고 중상자라도 더는 죽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죽음의 숫자는 늘어났고 가짜이길 바란 뉴스는 현실이 되었다. 정부가 발 빠르게 대처하고, 외국 방문 중인 서울시장이 급히 귀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죽어간 청춘은 살아오지 못한다. 죽기 전에 죽지 않게 해야 했다. 사고 후 발 빠른 수습이 사고를 예방하는 것보다 나을 수는 없다.

'예견된 참사'라는 모순

'예견된 참사'라 했다. 비겁한 진단이자 모순된 단어의 조합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짐작한다는 '예견'. 대참사를 예견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막아야 했다.

일례로 <3년 만의 '노마스크 핼러윈'…이태원 구름 인파>라는 비슷한 제목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매일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태원을 찾을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당국에 사고 예방을 위한 질서 유지를 주문하지는 않았다.
 

<3년 만의 '노마스크 핼러윈'… 이태원 구름인파>라는 비슷한 제목의 기사들. 해당 기사에 사고 우려와 당국을 향한 질서 유지 주문은 없었다. ⓒ 구글 캡처

 
이런 뉴스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상이 빚어졌다. 일부 언론은 사고 전에는 홍보에 열을 올리더니 사고 후에는 개인의 부주의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예견된 참사라는 지적이 맞는다면 10만 명의 구름 인파를 모으는 데 한몫한 언론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통상과 달리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지금 파악을 하고 있고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3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관계 부처 장관 브리핑)

"이건 축제가 아닙니다.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내용도 없고 그냥 핼러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되겠죠."(박희영 용산구청장, <"핼러윈은 축제 아니라 현상"? 용산구청장 발언도 논란> MBC, 10.31)
 
정부 당국자의 면피성 발언은 더 가관이다. 섣불리 정권의 책임 운운할 생각은 없다. 대통령 출퇴근 경호 인력 때문에 경찰 배치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가항력적 천재지변도 아니고 치안과 질서를 담당하는 공권력이 미치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156명의 시민이 압사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질서 유지 의무를 방기한 공권력에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되었는데 정치와 연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주장이야말로 분별없는 정권 감싸기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축제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했다. 주최 측도 없이 사람이 모이는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청으로서는 대책이나 대비 의무가 없다고 말한 셈이다.

그렇다면 사고 전날인 28일 부구청장 주재로 '핼러윈 데이 대비 긴급 대책회의'를 연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날 구청장은 직접 주민 안전 확보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안전신문〉과 인터뷰하기도 했다('할로윈 데이' 앞두고… 이태원 있는 용산구 "안전확보에 만전" <안전신문> 10.28). 용산구청장은 결국 1일 "구청장으로서 용산구민과 국민 여러분께 매우 송구스럽다"라는 입장문을 냈다.

핼러윈 데이 행사 안전에 구청과 본인의 노력까지 홍보했던 구청장, 추모는 하지만 책임은 없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이상민 장관 역시 1일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현안보고에서 자신이 한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궤변이 닮았다. 구청장 말대로 주최 측 없이 10만 명이 모이는 행사였다면 구청이 더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헌법에 규정돼 있다.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의 보호는 경찰의 책무이기도 하다. 10만 명이 모인다는 예상이 수차례나 있었던 행사에 교통·통행 제한, 밀집 방지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세우지 않는 건 국가 기관의 직무 유기다.

윤석열 대통령이나 중앙 정부의 책임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용산구청과 서울시청, 서울경찰청과 행정안전부는 직·간접적으로 이번 참사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 자기 살길 찾으려고 유가족뿐만 아니라 국민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이태원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이희훈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

진실규명보다 추모를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선의보다는 얄팍한 정치적 계산이 먼저 읽힌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그동안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지 못해 만들어진 법이다. 1명의 사망 사고에도 대표에게 실형이 가능하도록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관청과 경찰이 질서 유지를 방기해 156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국의 방임과 안전불감증이 낳은 중대재해다.

이 억울한 죽음이 왜 일어났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추모와 진실 규명, 책임 규명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다.

국민은 또다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한 대한민국을 그렇게 외쳤지만 또다시 원점이다. 과로사로 자다가 죽고, 지게차에 깔려 죽고, 용광로에 떨어져 죽고, 기계에 끼여 죽은 청춘들. 이태원 골목길에서 죽은 이들도 그 세대 청춘들이다. 국가는 청춘들에게 참 잔인하다. 기성 세대로서 죄스러움이 크다. 우리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지 못했다. 또다시 젊은이들을 죽게 했다.

다시 상복 입는 고통을 마주한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커서 또 이렇게나 많이 죽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당부한다. 정부는 책임을 규명해야 할 소임을 안고 있다. 고통스러운 개혁이 없다면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젊은이들이 희망을 안고 살아갈 나라로 나아가기 어렵다.

책임지는 자세로 진실을 규명해 주기 바란다. 국화꽃도 포개어 올려 놓기 무섭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통령은 직시했으면 한다. 대통령실과 불과 몇 k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국가가 제 역할을 못 해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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