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더 헬멧>은 ‘룸 서울’과 ‘룸 알레포’ 두 이야기로 구성되는 연극이다. 각 이야기는 다시 하나의 공간을 벽으로 나눈 ‘빅 룸’과 ‘스몰 룸’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룸 알레포’는 시리아 내전을 배경으로, 빅 룸에서는 구조대 ‘화이트 헬멧’ 대원들이, 스몰 룸에서는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 9살 소년 바셋(혹은 소마)가 등장한다. 관객은 어느 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경험하고, 두 공간을 가르던 벽이 열릴 때 비로소 각자의 이야기가 맞물린다.[기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10주년 <카포네 트릴로지> <벙커 트릴로지>도 10주년이 걸렸거든요. <더헬멧>도 올해를 사실상 10주년으로 삼고 한 거거든요. 이 작품도 <카포네>나 <벙커>처럼 계속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제가 없어도 객석이 꽉 차면 좋겠어요.

▲ 사실상 10주년 <카포네 트릴로지> <벙커 트릴로지>도 10주년이 걸렸거든요. <더헬멧>도 올해를 사실상 10주년으로 삼고 한 거거든요. 이 작품도 <카포네>나 <벙커>처럼 계속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제가 없어도 객석이 꽉 차면 좋겠어요. ⓒ 곽우신


"어른이 되고 싶어요."

시리아의 9살 소년 바셋(혹은 소마)의 소원은 거창하지 않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지만, 그것보다도 그저 무사히 어른이 되는 게 우선이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다. 하지만 연극 <더 헬멧> '룸 알레포'에서 그 평범한 소망은 벽에 가로막혀 너무나 멀리 있다.

시리아 내전 한복판, 아이는 아빠의 말에 따라 방 안에 머무른다. 새로 이사 온 이웃 아저씨도 오늘은 방 안에만 있으라고 했다. 굉음 그리고 붕괴. 아이는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다. 벽 너머 '빅 룸'에서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시리아의 자경단, '화이트 헬멧' 대원들이 생존자를 찾고 있다. 폭탄이 언제 다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끼인 구조자들조차 자신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지만, 이들은 한 명의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하나의 시신이라도 가족의 품에 인도하기 위해 재를 뒤집어쓴다.

'스몰 룸' 안의 아이에게 사람들이 하나씩 찾아온다. 축구 이야기를 나누고 비눗방울을 불며, 아이는 잠시 전쟁 바깥의 세계를 꿈꾼다. 벽 너머에는 화이트 헬멧이 소년을 구하기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있다.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도 숨을 죽이며, 저 벽이 열리기를, 아이가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아이를 연기하는 배우 이석준이 이해한 그 장면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경계가 아니라, 비극적 결말 위에 피어난 '꿈'에 가깝다.

"사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매몰된 아이예요. 저는 거기 매몰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아빠가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여기 방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환상인 거죠. 이 사람들이 입은 옷들도 내(아이)가 그려낸 옷 같은 걸 입었을 테고요.

저는 아이를 구해주는 장면도 화이트 헬멧과 바셋 양쪽의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힘을 내야 돼'하고 '꽝' 한 다음에 암전되고, 다시 폭탄 소리가 들리잖아요? 화이트 헬멧 단원들조차 이 아이를 구하려다가 거기서 매몰이 되고 끝났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그다음 어른들이 일어나 아이와 마주보고 '일어나'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이죠. 전쟁도 없이 춤을 추고 축구를 하는 마지막. 아마 연극이 아니라 영화였다면 전쟁이 다 끝나고 그 사람들이 평범한 옷을 입고 다 같이 축구하는 장면으로 끝났겠죠."

연극 <더 헬멧> '룸 알레포'의 결말을 연출은 닫아두고 싶지 않았다. 객석을 나가는 관객이 그래도 긍정적 희망을 안고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정작 아이를 연기하는 배우 이석준 개인은 해석을 닫아 놓는다. "어른이 되고 싶다"라던 간절한 소원, 이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처절한 몸부림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이석준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아이 한 명의 죽음으로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한 아이에 국한된 얘기만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아이가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아이가 없는 건 아니거든요. 매몰되지 않아도 매몰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 아이는 죽었지만, 여전히 갇혀 있는 아이들, 갇혔다가 살아난 아이는 분명 존재할 거예요. 평범한 축구선수를 꿈꾸다가 다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될지언정, 그 아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찾을 거예요."

지난 20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이석준은 자신의 마지막 <더 헬멧>을 보내고 있었다. 앞선 '룸 서울' 이야기에서 백골단 대장을 후배들에게 넘기고 시원하게 작별하는 중이었다면, '룸 알레포'에는 아직 다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숙제를 뒤로 남겨둔 채, 그는 매몰된 방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살인 척하지 않는 법

초연에서 배운 것 저는 지금도 소마 연기는 '정원조'가 1등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볼 때 ‘졌다. 저건 죽어도 못 이기겠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원조가 축구를 아예 못해서 공 가지고 노는 장면도 초연에서 뺐는데, 그런데도 진짜 9살 같았어요. 그래서 정말 많이 배웠죠.

▲ 초연에서 배운 것 저는 지금도 소마 연기는 '정원조'가 1등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볼 때 ‘졌다. 저건 죽어도 못 이기겠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원조가 축구를 아예 못해서 공 가지고 노는 장면도 초연에서 뺐는데, 그런데도 진짜 9살 같았어요. 그래서 정말 많이 배웠죠. ⓒ 곽우신


이석준이 처음 소마를 연기할 때는 '자괴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관객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좁은 방에서 9살짜리 아이가 되어야 했다. 자신보다 어린 배우를 향해 "아빠"라고 부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창작진에게 "연기력 테스트하는 거냐?" "나 놀리려고 하는 거냐?"라며 볼멘소리도 적잖이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아이처럼 보이는 방법을 찾았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더 많이 붙이는 대신, 아이의 생각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따라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석준이 찾은 방법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귀여운 표정을 짓는 쪽에 있지 않았다. 대신 아이다운 순수하고 즉자적인 순간들을 연결했다. 지금은 같은 역할을 맡은 후배들에게도 "귀여운 척하지 마"라고 주문한다. 관객이 성인 배우를 실제 9살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를 굳이 바꾸거나 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지금 아이라면 갑자기 생각이 돌아가서 딴 거 하겠지. 어디 가려우면 긁겠지. 얘기하다가도 귀찮으면 이거 뜯겠지.' 이런 것들의 연속이에요. 지금도 후배들이 연습할 때 애인 척하는 순간이 나오면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귀여운 척하지 마. 이상해. 우리가 나이가 그만큼인데 그게 이상해질 거야'라는 얘기를 해요.

어차피 우리는 나이 먹은 사람이잖아요? 젊은 배우가 나이 많은 배우에게 '아빠'로 불리는 순간 관객들한테 그 판타지는 이미 깨졌어요. 줄 수 없는 걸 억지로 주려고 하는 순간에 오는 거부반응이 오히려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 나이에서 이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거죠. 처음에는 지이선 작가랑 김태형 연출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연습하다가 느낀 건 삶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아이의 삶을 이해했을 때 오는 행동과 태도, 그 페이소스가 느껴지겠다는 부분이 있었죠."

9살처럼 보이는 것과 9살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감추려고 애쓰기보다, 그 시간을 통해 아이의 삶에 다가가는 쪽이었다.

'룸 알레포'에서 그 '아이다움'을 표현하는 또다른 장치는 '비눗방울'이다. 작 중에는 축구공과 함께 비눗방울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축구선수를 꿈꾸는 아이에게 공이 왜 소중한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눗방울은 무엇일까. 이석준은 그 작은 놀이 안에서 아이가 꿈꾸는 세계를 발견했다.

"비눗방울은 가장 평화로울 때만 할 수 있는 놀이잖아요. 축구는 전쟁 중에도 할 수 있지만, 비눗방울 자체는 아이의 순수함을 얘기하는 거란 말이죠. 이 아이가 꿈꾸는 세상이 비눗방울이지. 지이선 작가가 이런 오브제를 기가 막히게 써요. <카포네 트릴로지>의 풍선이라든지, <벙커 트릴로지>의 탄피라든지, 그런 식으로 오브제가 연결되는 구조를 좋아하거든요. 양쪽 방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게 비눗방울밖에 없어요. 축구공은 터진 축구공이라는 다른 오브제이지만, 실제로 판타지를 등장시키는 건 비눗방울밖에 없어요. '이 모든 게 판타지 속에 들어가 있어'라는 걸 보여주는 소재가 비눗방울인 것 같아요. 터질 것 같은 느낌의."

아름답지만 금방 터질 수 있는 비눗방울은 그가 마지막 장면을 환상으로 이해하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그렇다고 이석준이 '룸 알레포'를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두 방을 연결하는 것은 끝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룸 서울'과 '룸 알레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 돌아가고 싶은 학생과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바라던 미래는 특별한 영웅의 삶과 거리가 멀다.

"사실 '룸 서울'하고 같아요. 학생운동하던 아이도 '우리 학교에서 만나자'라고 얘기하는 평범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거고, 이 아이도 그냥 축구선수. 훌륭한 축구선수도 아니고 그냥 축구선수. 당신 같은 어른. 그냥 내가 먹고 자라서 일반적인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예요. 사람을 구하는 이들도 아이랑 축구하고 놀았던 아빠, 누군가의 아버지나 엄마, 친구, 동생이었던 사람들이고요. 그 순간의 일상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얘기예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동시대성 저희가 처음 공연할 때도 시리아는 내전 중이었거든요. 그러면 그게 끝났을 때도 ‘그들이 그 꿈을 이루었을까?’라는 것도 있고요. 지금 시대의 관객들이 이해하는 것도 우크라이나가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알레포 얘기가 아니더라도 사실 이건 끊임없이 벌어질 일이에요.

▲ 동시대성 저희가 처음 공연할 때도 시리아는 내전 중이었거든요. 그러면 그게 끝났을 때도 ‘그들이 그 꿈을 이루었을까?’라는 것도 있고요. 지금 시대의 관객들이 이해하는 것도 우크라이나가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알레포 얘기가 아니더라도 사실 이건 끊임없이 벌어질 일이에요. ⓒ 곽우신


화이트 헬멧 대원들이 지키려는 것 역시 그 일상이다. 초연에는 없던 오프닝이 재연부터 새롭게 생겼다. 공교롭게도 이석준이 유일하게 참여하지 못한 시즌에 추가된 부분이었다. 이 장면에서 이들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과,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들을 향한 분노 사이에서 흔들리고 갈등한다.

"걔네들이 싸우는 게 그거잖아요. '나도 반군처럼 그렇게 쏴 죽이고 싶어.' '지금 너까지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떡해?' 반군한테도 욕먹고 정부군한테도 욕먹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강아지 한 마리가 있으면 먹을 거라도 주고 싶어 하는 애들이었단 말이에요. 평범하게 살고 싶고, 평범하게 죽고 싶은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을 죽이려고 할 때 '너희들이 그런다고 우리는 사라지지 않아'라는 얘기를 하면서 죽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생각이라는 건 그렇게 짓밟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역설적으로 좀 더 외치고 싶지 않았나 싶어요."

그 평범한 사람들이 놓인 비범한 상황을 무대 위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석준이 느끼기에 '룸 서울'과 '룸 알레포'의 차이는 배우와 관객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의 거리에도 있었다. 백골단의 복장만으로 충분히 전달되는 '룸 서울'의 공포와 달리, '룸 알레포'의 돌더미는 그것을 놓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알레포가 힘든 건 관객들이 알레포 상황을 몰라서예요. 서울은 뼛속에 새겨져 있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백골단이 딱 청재킷 입고 등장하는 순간 '무섭다'라는 게 본능적으로 와요. 그런데 돌더미에서 사람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감이 없어요. 처음에 연습할 때는 돌도 없었단 말이죠. 박스를 갖다 놓고 연습했어요. 제가 옆에서 보다가 '무슨 여기 집 청소하러 온 것 같아. 입주청소하러 온 사람들 같아' 그랬어요. (웃음) 우리가 싸워야 되는 건 공포도 있지만, 폭탄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것, 더위와 답답함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거랑 싸워본 적이 없으니까 표현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호흡 연습을 되게 많이 했어요."

지친 사람처럼 보이는 표정만으로는 부족했다. 얼굴을 더럽게 분장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잔해를 뒤졌지만 아직 사람을 구하지 못한 몸, 그러면서도 계속 움직여야 하는 몸이 필요했다. 배우들은 공연에 들어가기 전부터 뛰었다. 이석준이 요구한 것은 큰 소리보다 '찐득함'이었다.

"지금도 '룸 알레포'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이 엄청 많이 뛰어요. 이건 찾다 찾다 지친 사람들의 얘기거든요. 저희가 공연을 하루에 세 번 하는 날, '룸 알레포'를 마지막 회차에 하면 공연이 너무 잘돼요, 배우들이 다 지쳐 있어 가지고. (웃음) 그런데 알레포부터 시작하면 이게 안 잡혀요. 에어컨도 시원하게 트니까 우린 덥지도 않고, 돌도 몇 개 없는데 얼굴에 때를 좀 칠했다고 해서 막 더러운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환경으로 들어가는 게 되게 어려워요.

하루라도 뭔가를 놓치면 '이리 와봐. 오늘 뭐 이상해'하고 배우들끼리 서로 모여서 얘기해요. 이 공연이 쉽게 갈 리가 없는데 잘 됐어? 그럼 뭔가 잘못된 거죠. 이 공연은 되게 '찐득'해야 해요. 관객들이 볼 때 배우들의 고통이나 답답함이 너무 걸쭉해서 끈적끈적하게 다가가야 하는데, 지금 너무 쾌적하다? 그러면 그냥 너무 소리만 꽥꽥 지르고 있는 거죠. '우리 힘들어!'하고 소리 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찐득함이 없으면 이들의 고통이 관객에게 안 보이는 거죠."

반대편 방에 남은 숙제

돌아올 작품과 아닌 작품 <벙커>도 안 될 것 같아요. 소년병 역할을 해야 하는데, 난 소년이 아니라고 몇 번 얘기했어요. (웃음) 그런데 <카포네>는 오케이. 거기서는 올드맨이잖아? 나는 영원히 올드맨일걸? 나이가 60이 되어도 <카포네>에서 할아버지는 괜찮지 않나요?

▲ 돌아올 작품과 아닌 작품 <벙커>도 안 될 것 같아요. 소년병 역할을 해야 하는데, 난 소년이 아니라고 몇 번 얘기했어요. (웃음) 그런데 <카포네>는 오케이. 거기서는 올드맨이잖아? 나는 영원히 올드맨일걸? 나이가 60이 되어도 <카포네>에서 할아버지는 괜찮지 않나요? ⓒ 곽우신


오래 고민해온 만큼, 이석준은 반대편 큰 방에 직접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번 시즌 이석준은 아이가 아니라 빅 룸의 아버지를 연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스몰 룸에서 쌓아온 경험을 가지고 두 방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고도 싶었던 것이다.

"사실 이번 시즌은 알레포 빅 룸으로 가고 싶었어요. 역할을 바꿔서요. 처음 만들 때 알레포 스몰 룸 세팅에 제가 많이 참여했거든요. 제가 스몰 룸에서 혼자 사람들을 맞이하는 역할이다 보니까 창작진과 아이디어도 같이 내면서 함께 만든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벽 너머에서 너무나 아이를 구하고 싶어하는, 이미 자기 아들을 잃은 아빠 화이트 헬멧을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 생각했죠. 제가 이쪽(스몰 룸)에서 본 게 있으니까 이걸 연결시키면 좋겠다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서 욕심을 좀 냈었거든요? 그런데 여지없이 또 어린이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드라마적으로 빅 룸이 스몰 룸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도구로만 오해받는 건 싫어요. 몇 가지 서사가 더 붙을 수 있을 텐데, 아직 못 찾은 것 같아서 마지막에는 그걸 한번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 약간 있긴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직 숙제가 남은 것 아닌가? 숙제가 남았다면 그 아쉬움을 털어버리기 위해 다음 시즌에도 돌아와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그건 뭐 이제 제 숙제가 아니죠! (웃음) 실질적인 숙제는 끝났고, 제 숙제는 이제 연출한테 넘겨야죠. (웃음) 사실 처음에 섭외가 왔을 때도 거절하려고 만났어요. 그런데 이번에 워낙 새로운 팀으로 바뀌다 보니까 가이드할 팀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초연 때 함께한 다른 배우도 못 오고 하니까 '그럼 내가 넘겨주는 사람으로 하고, 대신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한 거죠."

이번 출연은 애초부터 마지막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처음 섭외 연락을 받았을 때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팀에 작품을 넘겨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흔쾌히 다시 이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이 방을 나가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아이를 연기하는 어른의 몸이 더는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룸 서울'의 액션이 몸을 다치게 한다고 여겼다. 곤봉을 휘두르고 넘어지고 부딪치는 일의 부담은 눈에 보였다. 그런데 요즘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알레포였다. 9살짜리 아이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 헬멧> 시작부터 지금까지 매번 다쳤어요. 처음에는 무릎이랑 족저근막염이 왔고, SPAF(서울국제공연예술제) 나갈 때도 허리를 다쳐서 복대하고 공연했어요. 곤봉 휘두르다가 팔, 어깨가 나가기도 했고요. 다른 데 몸 쓰는 작품도 진짜 많았는데 여기서만 항상 다쳤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알레포가 힘들더라고요. 체력적으로 힘든데 '뭐가 힘들지?' 생각해보니까 애니까 '앉았다, 일어났다'를 계속 해야 되잖아요. 그게 개인적으로 타바타 운동 같더라고요. (웃음) 무릎이 자꾸 나가는 걸 느꼈어요. '아, 이제 그만할 때가 됐구나.' 처음에는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보다 체력적인 문제가 더 큰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어봐요. '공연하는데 이렇게 다칠 수 있나?'하고 물어볼 정도니까. (웃음) 제가 지금 놓지 않으면 진짜 나중에 추한 모습을 보여드릴 것 같아서, 이제는 진짜 놓아줘야죠."

시간은 지나가는 게 아니라 쌓인다

작품에 쌓이는 시간 운동에 대한 과학적인 기법들이 누적돼서 기록이 발전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작품을 찾기 위해 감성적으로 찾아왔던 모든 것도 기록돼 있고 누적돼 있어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도 그 누적된 바탕 위에 자기만의 생각을 입혔으면 좋겠어요.

▲ 작품에 쌓이는 시간 운동에 대한 과학적인 기법들이 누적돼서 기록이 발전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작품을 찾기 위해 감성적으로 찾아왔던 모든 것도 기록돼 있고 누적돼 있어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도 그 누적된 바탕 위에 자기만의 생각을 입혔으면 좋겠어요. ⓒ 곽우신


이석준은 자신의 출연이 끝나는 것과 작품의 시간이 끝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로 보았다. 오히려 다음 배우가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다만 그가 겪었던 시행착오까지 처음부터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알레포의 고통을 무대 위에 구현하기 위해 함께 찾았던 감각만큼은 남겨주고 싶었다.

"후배들한테 진짜 많이 얘기하고 싶고, 그래서 진짜 많이 하고 있어요. '너네들이 결국 내 거 할 거야. 너네들은 더 잘하겠지. 왜냐하면 네 것도 해봤고 내 것도 해봤으니까. 대신 이것만은 잊어버리지 마라.' 알레포는 매번 그런 것 같아요."

그 마음은 그가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닿아 있었다. 지나간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쌓인다. 이석준은 모래시계 아래로 떨어진 모래처럼, 과거가 지금의 자신을 떠받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깊어진 건 제가 깊어졌으니까. 나이를 더 먹었으니까 작품에서 보이는 것들이 많아진 건 확실히 있어요. 대신 그건 전달할 수 있는 계제도 아니고, 넘길 수 있는 계제도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 시간이 흘러 지나가고 과거가 되는 게 아니라, 현재에 계속 축적되고 있다는 거예요.

밑에 계속 쌓이고 있어서 내 삶을 다 지탱하는 총량이 되는 건데, 우리는 그걸 지나가버린다고 생각해서 지금 현재를 사는 것에 대해 착각하는 것 같아요. 과거와 현재가 계속 쌓이면서 만들어져 가고 단단해져 가는 거죠. 연극도 공연을 거듭할수록 작품에 대한 무게가 계속 늘어날 거란 말이에요. 의미도 그렇고요. 그래서 예전 것을 치우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보다, 그 바탕 위에 뭔가가 잘 더해지기를 바라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은 이석준에게 단순히 떠날 준비를 하는 공연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쌓아온 것 위에 다른 배우들의 생각이 더해지는 과정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여전히 남은 아쉬움은 다음 사람의 숙제가 되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한 회의 공연에 집중한다. 마지막으로 관객을 향한 '영업 멘트'를 부탁했더니, 이석준은 이번 시즌을 향한 애정과 다음 시즌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함께 내놓았다. 이석준의 '마지막' <더 헬멧>은 오는 10월 11일 시즌을 마무리한다.

"아, 진짜 <더 헬멧> 저는 정말 안 합니다. 진짜 안 해요. 누가 펑크 나서 '하루만 도와주세요' 해도 안 할 거야. 그래서 제가 한 회, 한 회를 놓치는 거 없이 하려고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 배우들도 합이 진짜 좋아요. 이 작품은 섞여 있어요. 그러니 지금 보러 오세요!"

마로니에 환갑잔치 초연할 때도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걸 시켜? 젊은 애들 시켜야지’ 하고 장난쳤거든요. 그때 배우들이 ‘환갑잔치 때 곤봉 들고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한번 해’ 이런 농담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게 생겼어요. (웃음) 그 전에 떠납니다!

▲ 마로니에 환갑잔치 초연할 때도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걸 시켜? 젊은 애들 시켜야지’ 하고 장난쳤거든요. 그때 배우들이 ‘환갑잔치 때 곤봉 들고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한번 해’ 이런 농담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게 생겼어요. (웃음) 그 전에 떠납니다! ⓒ 아이엠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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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