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현정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음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보통의 클래식 연주가들이 콩쿠르를 거쳐 이름을 알리고 연주 무대를 넓혀가는 것과도 동떨어져 있다. 그 모든 길을 자신이 선택했고, 그 선택은 자신만의 삶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대화가 흥미로웠던 이유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에서 진행된, 내적 에너지로 충만했던 임현정의 인터뷰를 전한다.

자유와 본질에 대한 열망, 출가 대신 음악 선택

피아니스트 임현정 25일 오후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에서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인터뷰가 열렸다.

25일 오후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에서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인터뷰가 열렸다. ⓒ 봄아트프로젝트


임현정은 열두 살에 자신의 의지로 프랑스행을 택했다. 콩피에뉴 음악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고 루앙 국립음악원에 진학해 조기 졸업했다. 이후 2003년 프랑스 최고의 음악학교인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 이 학교 역시 2006년에 최연소로 수석 졸업했다. 유학 생활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학시절 저를 지탱했던 건 진짜로 음악이었어요. 제겐 언어가 없었잖아요. 말을 못하니까 '저 아이는 바보 멍청이구나'! 하며 외계인처럼 바라봤고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도 굉장히 심했어요. 유일하게 저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역가 같은 존재가 음악이었어요. 음악은 제게 단순히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저를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해준 절대적인 거였어요. 그래서 음악이 결국은 사명이 됐습니다." 

그는 20살 때 이렇게 결심했다고 한다. 굶어 죽더라도 음악만 하고 살겠다고.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명이란 충실한 해석자로서의 삶이었다.

"작곡가의 삶의 본질이 그대로 담겨 나온 게 음악 작품들인데, 그 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해석자로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됐어요. 신부나 목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부름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사명이 제게 생겼어요.

16살 때 출가해서 비구니의 삶을 살려고 했어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컸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거든요. 외부적인 모든 게 군더더기라고 여겨져서 그런 것을 벗어던지고 영혼의 에센스를 탐구하고 싶었어요. 스님이 되면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오직 명상과 기도만 할 수 있으니까요. 어머니도 '그게 네가 행복한 길이면 하라'고 적극 찬성하셨는데 스님이 거절하셨어요. 그래서 출가 대신 피아노를 택했고 피아노를 핑계로 자유의 삶을 찾아 프랑스로 갔어요. 그런데 피아노가 제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죠."

힘든 외국생활에서 음악이 자신의 언어가 되어줬을 때, 하모니 하나하나가 세포를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을 했다. 같은 곡도 너무 다르게 들렸다. 한국에선 라흐마니노프 곡을 들었을 때 모터소리처럼 웅웅거리게 들렸는데 프랑스에 가선 장님이 눈을 뜬 것처럼 한음한음이 와닿았다. 갑자기 정신이 확 깨는 게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에서 깨달았다. 음악을 통해서도 충분히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데 자신이 수단(종교)에만 집착하고 있었단 사실을.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본질의 탐구가 된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음악에 더욱 몰두했다. 

클래식 음악은 영혼을 끌어올린다

임현정 피아니스트 임현정

임현정은 이날 오전 5시에 입국해 곧바로 일정을 소화했지만 에너지 넘쳤다. ⓒ 봄아트프로젝트


"예술은 영혼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겐 그 수단이 음악이에요. 피아노는 도구고요. 예술은 빗자루질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고 봐요. 빗자루질을 할 때 아름다움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한다면 그 행위는 예술 행위가 되는 거예요. 굳이 절이나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어떤 사명감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저는 사람의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별이 항상 따라다닌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면 보이지 않은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요. 절대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임현정은 음악을 '사운드의 과학'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사운드를 가장 조화롭게 배치하면 하모니가 탄생하는데 그런 관점으로 봤을 때 클래식 음악은 그 레벨을 가장 최고로 끌어올린 음악"이라고 말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영혼, 본질, 에센스는 승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몸도 과학적으로 봤을 때 세포로 이루어진 거잖아요. 바흐 음악이 갖는 그 아름다운 진동이 우리 인간 마음의 진동과 만났을 때, 우리 무의식 세계는 발전하고 승화해요.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 상태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승화하고 우리 영혼을 끌어올려줘요."

그는 본질, 영혼, 에센스란 단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작곡가가 자신의 삶 속에서 느낀 모든 감정의 엑기스를 짜낸 게 음악인데, 연주자인 저는 그 음악 안으로 들어가서 작곡가의 에센스와 저만의 에센스가 만나게끔 노력해요." 음악을 '해석'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도 그는 이렇듯 영적인 차원으로 접근했다.   

침묵이 소리치는 순간

임현정 피아니스트 임현정

임현정은 자신의 공연을 정말로 사랑하는 아티스트였다. ⓒ 봄아트프로젝트


임현정은 지난 2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출간한 출판사인 프랑스의 '알방 미셸(Albin Michel)'에서 음악과 영성에 관한 에세이집 <침묵의 소리>(Le Son du Silence)를 출간했다. 원래 책을 쓸 계획이 없었는데 프랑스의 한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에서 나눈 인터뷰를 '알방 미셸' 출판사 편집장이 듣고 그에게 출간을 제의했다. 그의 책은 음악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침묵을 이야기한다. 음악을 말하기 위해 침묵을 말하는 것이다.

"침묵은 음악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라 생각해요. 피아노 앞에서 내가 맨 처음에 내는 첫 소리는 바로 전에 내 안에 있는 침묵의 질에 따라 굉장히 많이 바뀌어요. 내면의 침묵의 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 침묵이 고귀하고 아름다워야 그 다음에 나오는 사운드도 아름다워요. 그래서 침묵이 첫 음입니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침묵이 있죠. 그때의 침묵 거의 뭐... 소리지름이에요. 2시간의 음악에 담겨있는 메시지나 에센스가 얼마나 강렬했나, 그것이 무엇이었냐에 따라서 연주가 끝나고 나서의 침묵이 달라지죠. 그런 측면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했을 때, 피아노 소리가 끝나고 마치 침묵이 소리지르고 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다가와요."

그는 "침묵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며 둘은 손바닥의 앞뒤처럼 언제나 함께 가는 것이라 비유했다. 무언가를 그리려면 백지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침묵은 음악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공연을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을 밝혔다.

"공연을 본다는 건 굉장한 일 같아요. 3000명이 같은 자리 같은 장소에 앉아서 침묵하고 있죠. 그리고 다 같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만약 100명이 모여서 단체로 기도하거나 합동 명상을 한다면 그곳에도 장난 아닌 에너지가 나오는 거고,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죠. 그런데 공연장은 더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으니, 2시간 공연에 2000명의 관객이라면 4000시간이 모인 거예요. 그 4000시간을 최대한 아름답게 만드는 게 제 의무입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꿀팁'

피아니스트 임현정 25일 오후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에서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인터뷰가 열렸다.

임현정은 자신의 철학을 다양한 비유를 사용해 이야기했다. ⓒ 봄아트프로젝트


임현정은 관객이 무언가를 느끼거나 못 느끼는 건 연주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연주하며 폭풍을 표현했는데 청중이 폭풍을 못 느꼈다면 100% 연주가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말 고귀한 청중은 오히려 음악에 문외한인 청중"이라며 "만일 '템페스트'가 폭풍을 표현한 곡이란 걸 모르고 온 청중이 '이 곡은 마치 폭풍같아요!'라고 말한다면 그 연주야 말로 완벽한 성공"이라고 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음악을 감상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가장 순수하게 그 음악을 받아들이는 게 제일 좋은 감상법 같아요. 언어와 똑같아요.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선입관을 갖고 단정을 짓고나서 이야기하면 그 사람 이야기가 귀에 안 들어오잖아요. 음악도 머리에 너무 많은 생각이 있으면 안 들어와요."

그러면서 그는 두 곡을 추천했다. "만약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들어보라"며 "죽고 싶은 생각이 나도 그 음악이 저를 이해하는 것 같아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바뀐다"며 자신의 경험을 덧붙였다. 또 다른 곡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의 4악장을 추천했다. "이 음악을 들으면 어떤 분이라도 테이블 위에서 댄스를 추고 싶을 것"이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베토벤은 20대의 숙제였다... '미션 클리어'



그 어렵다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가 그의 첫 앨범이다. 지난 2012년 임현정은 한국인 최초로 인터내셔널 버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EMI Classics)을 녹음했다. 2002년 피아니스트 임동혁 이후 10년 만에 EMI가 선택한 한국인 아티스트였다. 그는 이 앨범으로 빌보드 클래식 차트와 아이튠즈 클래식 차트 1위에 오르며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가 일으킨 반향은 권위에 갇힌 클래식계를 향한 반항 같기도 했다. 이후 한 연주회에서 앙코르로 연주한 '왕벌의 비행'은 54만이 넘는 유튜브 조회수 올리며 세계에 그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살 때 저 자신에게 10년의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어요. 20대 때 머리가 빠르게 돌아갈 때 내가 생각하는 기본의 음악, 예를 들면 바흐나 베토벤의 곡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피아니스트로서 당연히 해야할 '숙제' 같은 거라 여겼고, 10년이란 시간은 대작곡가의 래퍼토리를 하나하나 익혀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어요. 출세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콩쿠르를 선택하게 되면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게 될 것 같아서 하지 않았어요."

그는 "더하기 빼기 같은 기본을 알아야 더 나은 단계로 가서 창의력이 나온다"며 바흐나 베토벤을 '기본의 의무'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또다른 예를 들며, 성질 못된 아내를 둔 소크라테스가 "말을 잘 타려면 성난 말을 타야한다"고 했듯이 치고 싶은 것만 치면 나를 단련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성난 말' 같은 베토벤 소나타 전곡에 도전했다고 덧붙였다.

모든 이는 자신만의 에센스를 지닌다


그는 '모든 이들은 동등하다'는 게 자신의 기본 생각이라고 밝혔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에센스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더불어 클래식 음악도 사회적인 한계 없이 누구나 누리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했다.

'베토벤 전문가'답게 임현정은 베토벤의 전기를 읽으며 감동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음악가가 광대나 하인처럼 취급받던 시대에 베토벤은 처음으로 독립적인 음악가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음악을 신성한 것으로 생각한 베토벤에게 어느날 왕자가 명령했다. "내 게스트를 위해 네가 음악 한 번 연주해보라"고. 이 말에 베토벤은 완전히 '뚜껑이 열려서'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음악을 가벼운 것으로 보고 천대하는 왕자에게 분노를 느낀 베토벤은 의자로 들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다행히 누가 온 몸으로 막아서 '살인자 베토벤'은 면했다고. 베토벤은 후에 자신의 격한 행동을 사과했는데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왕자님, 왕자는 예전에도 많았고 왕자님 후에도 몇천 명이 더 탄생할 것입니다. 당신은 탄생할 때부터 왕자였지만 저는 제 노력으로 베토벤이 됐습니다. 베토벤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읽고 크게 감명받은 임현정은 "나를 둘러싼 외부의 조건은 불리하게 돌아가지만, 내 노력으로 열심히 한다면 나도 베토벤처럼 유일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원하는 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한복 입고 외국 학생들에게 클래식과 한국 알려

임현정 피아니스트 임현정

2015년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한국. 그녀에게 이번 무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 봄아트프로젝트


임현정은 2015년 공연 이후 2년 만에 한국에서 공연을 연다. 오는 2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슈만, 브람스, 라벨, 프랑크의 곡을 연주한다. 이들의 곡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설레는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슈만이나 브람스 곡은 젊은 영혼과 성숙한 영혼, 모든 것이 다 들어간 곡입니다. 한 인간의 인간적인 면이 다 들어가있어요. 반면 라벨의 '거울'은 자연 그 자체의 사운드라고 봐요. 라벨을 칠 때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새가 되고 불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자연과 하나되는 것을 경험해요."

이번 래퍼토리는 그가 아껴둔 것이다. 20대의 숙제이자 의무였던 베토벤을 끝내면 내가 좋아하는 곡을 하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그걸 실천하는 연주회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들만 뽑아서 프로그램을 짰는데 그는 이것을 즐거운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신나는 마음으로 공연일을 기다리고 있다.

끝으로 '클래식 대중화'는 그가 실현 중인 꿈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엘리베이터나 레스토랑에서 들려오는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인식을 없애고 클래식을 대중화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외국에서 그는 학교를 찾아가 클래식을 접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친근한 어법으로 음악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들에게 한국 지도도 보여주고 연주를 들려준다. 그는 평소 음악회 무대에선 작곡가만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검은 드레스만 입어왔지만, 학생들을 만나러 갈땐 생활한복을 입는다.(이날 인터뷰에도 한복을 입고 왔다) 지금 그는 베토벤처럼 유일무이한 '임현정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임현정 피아니스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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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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