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끝내 집에 닿지 못하는 이 땅의 생활인들에게

[리뷰] 영화 <오디세이>

26.09.08 09:21최종업데이트26.09.0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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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천만 관객을 넘어섰다. 눈물을 짜내는 신파도, 영웅의 개선가도 아니다. 3시간 동안 값싼 위로를 한 번도 건네지 않는 영화다. 그런데 이 메마른 영화 앞에 천만 명이 모였다.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랬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영화에는 심판하는 자가 없다. 눈을 잃은 폴리페모스가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빌고, 그 직후부터 바다가 오디세우스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그 저주가 작동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저주가 통한 것인지 바다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이렇다. 회사가 무너진 데에도, 물가가 오른 데에도 이유가 있다고들 한다. 다만 그 이유를 정한 자리는 늘 화면 밖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벌을 받는 중인지 그냥 당하는 중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유예되는 귀향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시간의 덫이다. 배가 아무리 나아가도 시간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의 구조부터 그렇다. 그의 항해는 현재로 흐르지 않고 칼립소의 섬에 붙들린 남자가 되짚는 기억의 형태로 도착한다. 관객은 이 항해가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본다.

목적지는 계속 뒤로 밀린다. 키르케는 이타카로 가는 길을 일러주면서 그 길이 저승을 지난다고 말한다. 집에 닿으려면 죽은 자들에게 다녀와야 한다. 돌아가기 위해 더 멀리 가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귀향은 갈수록 길어지는 우회로다.

우리가 건너는 바다도 다르지 않다. 하나를 넘으면 그다음이 이름만 바꿔 서 있다. 입시를 넘으면 취업이 오고, 대출과 집값을 넘고 나면 자녀 교육이라는 물마루가 솟는다. 그것마저 다 치르고 나면 은퇴와 노후라는 암초가 수면 아래 잠겨 있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말한다.

"이번 일만 끝나면."
"대출만 다 갚으면."
"아이들만 다 키우면."

그때가 되면 내 삶으로, 나의 온전한 집으로 돌아가리라 믿는다. 그러나 다 왔다고 믿는 순간 다음 풍랑이 인다. 부하를 절반씩 잃어가며 다음 섬으로, 또 그다음 섬으로 밀려가는 오디세우스의 항로는 새벽에 몸을 일으켜 지하철과 도로 위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이 땅 생활인의 하루와 정확히 겹친다.

오늘의 파도를 넘는 일과 집에 닿는 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앞의 것을 뒤의 것이라 부르며 살아왔다. 귀향을 유예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유예 자체를 삶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노래를 중단시키는 손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이타카에서 오디세우스의 생환을 여전히 믿는 사람은 셋뿐이다. 페넬로페와 아들, 그리고 눈이 반쯤 먼 늙은 하인. 그가 떠난 지 20년이 그 믿음을 매일 조금씩 깎아낸다. 그런 페넬로페가 음유시인이 남편의 트로이 무용담을 부르기 시작하자 듣기 싫다며 노래를 중단시킨다.

기다리는 사람이 그런다. 그녀가 거부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노래로 만들어진 남편이다. 목마를 설계한 영웅으로 칭송되는 그 인물이 진짜 남편을 20년째 바다에 붙들어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밤마다 수의를 짜고 푼다. 낮의 노동을 되돌리며 왕국이 무너지는 속도를 늦춘다. 그것은 노동이다. 기다림이라는 말로는 덮이지 않는다.

오늘의 부부를 붙들고 있는 힘도 대개 그런 종류다. 청춘의 열정은 일찌감치 휘발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감정이라기보다 관성에 가까운 책임이다. 상대에 관한 근사한 이야기를 조용히 치워버린 자리에 매일 밤 풀어야 할 실이 남는다. 낭만이 없다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다. 가장 무거운 것일수록 이름 없이 굴러간다.

아들의 질문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연회장에서 텔레마코스가 어머니에게 항의한다. 저 구혼자들을 왜 그냥 두느냐고. 어머니는 답한다. 제우스의 법도에 따라 손님은 접대해야 한다고. 아들에게 그것은 굴욕이고 어머니에게 그것은 왕국을 지탱하는 마지막 형식이다.

부모 세대의 인내가 자식 세대에게는 비굴로 보이는 장면이다. 한국의 식탁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다. 견딘 사람은 견딤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보는 사람은 그것을 무기력으로 읽는다.

영화는 이 어긋남을 구조로 삼는다. 아버지의 회고와 아들의 질문이 따로 흐르다가 마지막에야 한자리에서 만난다. 그러나 만난다고 이해가 오지는 않는다. 아들이 원한 것은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은 아버지가 하고 아들은 지켜보는 자리에 남는다. 아버지는 왕좌를 넘긴 뒤 설명 없이 떠난다.

남는 것은 자리다.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묻던 아들이 이제 그 질문을 받는 쪽에 선다. 어머니가 20년 동안 어디에 서 있었는지는 그때 알게 될 것이다.

이타카를 떠나는 배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텔레마코스에게 넘긴다. 그리고 페넬로페와 함께 이타카를 떠난다. 스무 해를 건너 도착한 자리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시 배에 오른다.

방향은 서쪽이다.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며 문명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며 나아간다. 20여 년 전 출정 전날 밤, 어린 아들과 나라를 두고 떠나야 했던 남편에게 다 버리고 도망치자며 페넬로페가 먼저 가리켰던 바로 그 방향이다.

원전이 모험담이라면 놀란의 〈오디세이〉는 자기 죄를 깨닫는 여정이다. 영화는 트로이 목마로 문을 열고 불타는 목마를 바라보는 오디세우스의 얼굴로 닫힌다. 칼립소가 그를 놓아주며 건네는 요청도 원전과 다르다. 원전의 그녀는 이타카를 잊으라 했지만 영화의 그녀는 트로이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가 섬을 떠나는 것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개의 서쪽은 같을 수 없다. 트로이 전쟁 전의 서쪽은 죄를 짓기 전에 도망치자는 제안이었다. 그 밤에 배를 띄웠다면 목마도 없었고 불타는 도시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서쪽은 죄를 짓고 난 뒤에야 겨우 갈 수 있게 된 길이다.

서쪽으로 나아가며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우리 문명의 이야기는 훗날 그저 노래로만 남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우리의 죄도 다시 잊힐 것이라고. 씻어내겠다는 말이 아니다. 잊힐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이 영화의 진짜 얼굴이 여기 있다. 지켜낸 자리를 마침내 버리는 이야기다.

삭막한 진실이 주는 위로

영화는 회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피 흘린 바닥과 마모된 몸이 남고 되찾은 왕국은 이미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 황량한 풍경에서 위로를 얻는다. 세상은 원래 가혹하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잔인하다는 사실을, 놀란은 눈물 대신 정직함으로 내밀기 때문이다.

도착은 끝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왕국을 되찾고도 그 자리에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이타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그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왕국을 얻지 못하고 서로를 얻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20년을 견딘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같은 배에 오른다.

우리가 견디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 다 끝날 것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시간을 같이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다. 〈오디세이〉의 천만은 각자의 바다에서 소리 없이 파도를 받아내고 있는 이 땅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들이 서로에게 건넨 무언의 경의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4indi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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