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설 픽처스
연회장에서 텔레마코스가 어머니에게 항의한다. 저 구혼자들을 왜 그냥 두느냐고. 어머니는 답한다. 제우스의 법도에 따라 손님은 접대해야 한다고. 아들에게 그것은 굴욕이고 어머니에게 그것은 왕국을 지탱하는 마지막 형식이다.
부모 세대의 인내가 자식 세대에게는 비굴로 보이는 장면이다. 한국의 식탁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다. 견딘 사람은 견딤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보는 사람은 그것을 무기력으로 읽는다.
영화는 이 어긋남을 구조로 삼는다. 아버지의 회고와 아들의 질문이 따로 흐르다가 마지막에야 한자리에서 만난다. 그러나 만난다고 이해가 오지는 않는다. 아들이 원한 것은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은 아버지가 하고 아들은 지켜보는 자리에 남는다. 아버지는 왕좌를 넘긴 뒤 설명 없이 떠난다.
남는 것은 자리다.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묻던 아들이 이제 그 질문을 받는 쪽에 선다. 어머니가 20년 동안 어디에 서 있었는지는 그때 알게 될 것이다.
이타카를 떠나는 배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텔레마코스에게 넘긴다. 그리고 페넬로페와 함께 이타카를 떠난다. 스무 해를 건너 도착한 자리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시 배에 오른다.
방향은 서쪽이다.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며 문명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며 나아간다. 20여 년 전 출정 전날 밤, 어린 아들과 나라를 두고 떠나야 했던 남편에게 다 버리고 도망치자며 페넬로페가 먼저 가리켰던 바로 그 방향이다.
원전이 모험담이라면 놀란의 〈오디세이〉는 자기 죄를 깨닫는 여정이다. 영화는 트로이 목마로 문을 열고 불타는 목마를 바라보는 오디세우스의 얼굴로 닫힌다. 칼립소가 그를 놓아주며 건네는 요청도 원전과 다르다. 원전의 그녀는 이타카를 잊으라 했지만 영화의 그녀는 트로이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가 섬을 떠나는 것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개의 서쪽은 같을 수 없다. 트로이 전쟁 전의 서쪽은 죄를 짓기 전에 도망치자는 제안이었다. 그 밤에 배를 띄웠다면 목마도 없었고 불타는 도시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서쪽은 죄를 짓고 난 뒤에야 겨우 갈 수 있게 된 길이다.
서쪽으로 나아가며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우리 문명의 이야기는 훗날 그저 노래로만 남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우리의 죄도 다시 잊힐 것이라고. 씻어내겠다는 말이 아니다. 잊힐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이 영화의 진짜 얼굴이 여기 있다. 지켜낸 자리를 마침내 버리는 이야기다.
삭막한 진실이 주는 위로
영화는 회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피 흘린 바닥과 마모된 몸이 남고 되찾은 왕국은 이미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 황량한 풍경에서 위로를 얻는다. 세상은 원래 가혹하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잔인하다는 사실을, 놀란은 눈물 대신 정직함으로 내밀기 때문이다.
도착은 끝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왕국을 되찾고도 그 자리에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이타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그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왕국을 얻지 못하고 서로를 얻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20년을 견딘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같은 배에 오른다.
우리가 견디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 다 끝날 것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시간을 같이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다. 〈오디세이〉의 천만은 각자의 바다에서 소리 없이 파도를 받아내고 있는 이 땅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들이 서로에게 건넨 무언의 경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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