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것들> 스틸
일미디어
용케 꼬리를 밟히지 않던 카를로의 불륜이 폭로되는 결정적 계기는 한 권의 책이다. 두 번째 작품 집필에 머리를 싸매다 영감을 얻기 위해 최근 탐독하던 스탕달의 1830년 고전 '적과 흑'이 바로 그 책. 탕헤르의 공용어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 상용어는 프랑스어다. 주인공 부부들은 로마에서 왔으니 이탈리아어가 모어다. 당연히 카를로가 보던 책도 이탈리아어 판본일 테다. 그런데 블루가 손에 쥔 책은 여기에서 구했다는 이탈리아어 판본. 쉽잖은 우연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지중해 세계라 가능한 언어 유희의 변주로도 신통한 아이디어이지만, 소설 내용을 떠올리면 단지 중산층 부부의 불륜 치정극으로만 읽히던 <말하지 않은 것들>의 서사는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원작 소설은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복고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평민 청년의 위험한 신분 상승 욕망과 파멸을 담은 시대극이지만, 출세 욕망과 더불어 격정적인 로맨스 소설로도 훌륭한 작품성을 지닌 작품. 달리 고전 반열에 든 게 아니다.
영화를 젊은 내연녀 블루의 시선으로 뒤집어 본다면, 그녀의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은 '적과 흑' 소설 속 주인공 '줄리앙 소렐'의 그것에서 출세욕을 뺀 순수한 소유욕에 가깝다. 재능 넘치고 총명하지만,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청년이 부유한 귀족 여인들을 유혹하며 출세의 발판으로 삼다가 배신감에 사로잡힌 여성에 의해 파멸로 추락하는 내용은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역전시킨다면 묘하게 블루의 그것과 겹쳐 보이는 대목이다.
블루는 지방에서 불우한 환경을 딛고 로마의 명문대 진학한 재원이다. 학비를 벌기 위해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고학생 생활을 하던 중 선망하던 교수와 연인으로 발전한다. 카를로 역시 자신의 꿈을 돕지 않던 가족 곁을 뛰쳐나와 고학생 신분으로 자수성가에 이른 과거가 있었다.
파올로와 안나 부부의 갈등은 특별히 사회적 맥락으로 해석할 여지는 적지만, 그들의 딸 비토리아가 보이는 돌발성은 블루의 출현과 더불어 인물들 사이에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또 다른 축이다.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엄마에게 염증을 느끼며 지적이고 적당히 자신의 반항기를 받아주는 아빠의 친구 카를로에 친근감을 느끼는 소녀가 보이는 도발은 은근히 불길한 낌새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중년 남성을 흠모하는 그녀의 표정은 블루와는 차별화한 욕망으로 읽힌다.
우아한 가면 아래 소용돌이치는 욕망의 치정극
그렇게 두 가족, 여섯 명의 유럽 여행객은 북아프리카의 과거 식민지 배경 휴양지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물고 물리는 치정극의 소용돌이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용케 파국을 면하더라도 그들은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다.
엘리사는 담담히 이 모든 추락 과정을 내레이션으로 서술한다. 모든 걸 내려놓았기에 가능한 독백 조의 회고를 듣다 보면 굳이 그들의 후일담을 추측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회적 위신을 지키고 개인적 손해를 부담하지 않고자 겉으론 화목한 가족을 유지할 순 있을지언정 그들의 사이는 예전과 같을 순 없는 노릇. 오히려 되바라진 13살 소녀 비토리아가 어떤 미래를 맞을지 관객이 궁금할 법하다. 비토리아와 블루가 맺은 비밀스러운 인연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리에겐 윌 스미스가 주연한 <행복을 찾아서>와 <세븐 파운즈> 감독으로 알려졌지만, 본작을 연출한 가브리엘레 무치노는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중견 감독 중 일인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벌이는 중이다. 그의 신작 <말하지 않은 것들>은 오랜 동료 제작진, 단골 출연 배우들과 함께 감독의 장기인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의 모순을 세밀한 묘사와 치밀한 복선으로 세공한 미스터리 치정극의 얼개 속에 전복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한 줄기 새겨 넣는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여기 추가로 여전한 서구 제국주의의 오만과 편견, 과거 식민지였던 3세계에 대한 불신과 폄하의 감정, 중산층 백인 남성의 자기합리화와 성적 대상화 면모에 눈살을 찌푸리는 한편, 그들의 위선을 침범하는 욕망의 여성-괴물을 포착할 법하다. 그렇게 관객 각자 재구성으로 뜯어볼 구석이 곳곳에 숨겨진 작품이다.
<작품정보>
말하지 않은 것들
LE COSE NON DETTE
THE THINGS WE DON'T SAY
2026 이탈리아 드라마
2026.09.02. 개봉 114분 18초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가브리엘레 무치노
주연 스테파노 아코르시, 미리암 레오네, 클라우디오 산타마리아, 카롤리나 크레센티
음악 파올로 부온비노
촬영 파비오 자마리온
원작 엘리아 에프론
수입/배급 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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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