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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는 왜 그에게만 잔혹했나?

[리뷰] 영화 <오디세이>

26.08.18 17:50최종업데이트26.08.1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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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를 봤다. 신과 인간사를 아우르는 초대작임은 제목과 감독, 배우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이맥스관을 선택한 이유는 트로이 목마도,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도, 그가 사는 동굴도, 고대 군선도, 무엇보다 거대한 바다 모두 최대한 실사 촬영을 통해 스크린에 담았다는 설명이었다.

원작과 각색된 <오디세이>에 대한 깊이 있고 흥미로운 비교 분석, 장편 극영화 최초로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전체를 촬영한 이 영화를 아이맥스관에서 보는 게 최고의 선택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건 내 능력과 관심 밖이다. 단 한 가지 몹시 의아하고 불편해서 말하고 싶어진 건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 속 오디세우스의 인격이다.

오디세우스의 인격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 속 오디세우스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 속 오디세우스Universal Pictures

첫 장면부터 그는 곧 사냥할 사슴에게 제 목숨을 건 사투에 임할 기회를 주고자 빈 활을 튕겨 자기 존재를 알린다. 갓난 개들 중에서 제 역할을 다할 양치기 재목을 골라야 할 때도 상당히 유약해 뵈는 개체를 골라 그에게 평생 신뢰와 사랑을 준다. 결국 트로이전쟁을 통해 자신이 가장 신성시한 '제우스의 법'에 따라 환대해야 할 이방인들을 속이고 죽이며, 부하들이 무고한 이들에게까지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묵인하면서 깊은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얻는다. 오디세우스는 모순적이지만 이해도, 공감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오디세우스가, 정확히는 놀런 감독이 재탄생시킨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이전의 이해와 공감, 그로 인해 축적된 신뢰가 깨졌다. 극에 몰입한 상태에서 생각지 못한 의외성을 발견한 게 아니라, 암전된 영화관에 갑자기 불이 들어오거나 아예 기존 영화가 끝나고 전혀 다른 영화가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낯선 모습의 폴리페모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걸 보면서 느꼈을 공포와 분노는 짐작 혹은 상상이 된다. 놀런 감독이 영화 시작에 강조했듯 무려 삼천 년 전 '마법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니까. 그리고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도망 나온 뒤, 남은 부하들과 배에 올라 안전하다고 느꼈을 때 원작에서처럼 또 한 번 자신의 지략이 통해 승리했음을 자랑하고파, 자신이 '오티스(그리스어 Outis, 아무도 아님)'가 아니라 '이타카의 오디세우스,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라고 밝혔다면 그 정도 허세는 캐릭터에 대한 공감과 애정을 더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 앞에서는 사슴에게도, 갓난 개에게도, 트로이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잃지 않았던 인간됨을 상실한 듯 보였다. 괴물이라고만 여겼던 폴리페모스가 그들 자신과 같은 인간의 말을 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래서 부하 중 한 명이 대화를 해보자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며 자신의 경솔함과 잘못을 뉘우치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리곤 부하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지 않고 도망 나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고도 폴리페모스를 향해 화살을 쏘아 최악의 상황을 만든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장르가 무엇이든 뜨악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사실 오래전 봤던 놀런 감독의 <메멘토>도 지금까지 떠오르는 기억은 주인공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몰입을 방해했던 것뿐이다. 영화 속에 오롯이 담겨야 할 어떤 요소들이 부적절한 혹은 과도한 이질감으로 인해 현실 세계로 드러나 버린 듯한 느낌이다.

영화 속 '옥에 티'일까?

 영화 <오디세이> 속 폴리페모스
영화 <오디세이> 속 폴리페모스Universal Pictures

놀런 감독의 많은 인터뷰 영상을 봤지만, 폴리페모스를 대하는 인격의 극단적 모순에 대한 질문은 찾지 못했다. 세계적 거장 감독의 영화 속 '옥에 티'라 할 만한 각색의 허점일까, 나의 무지나 편견에 의한 곡해일까,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단지 다른 감성일까.

내가 느낀 위화감이나 당혹감의 이유가 무엇이든, 오디세우스가 사슴과 개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대한 태도와 폴리페모스를 대한 태도의 차이를 거듭 떠올리다보니 정반대의 질문이 바닷가에 박혀 있던 트로이 목마의 모습처럼 우뚝 드러났다. '그 오디세우스의 행위가 그렇게나 부자연스러웠나?'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모습인가?' '사실 현실의 무수한 사람들과 더욱 닮아 있지 않나?'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동물보호단체 활동가에게 들은 이야기다. 한 할머니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반려견을 팔에 안고서 저녁마다 길고양이에게 치명적인 물질을 사료에 섞어 골목 여기저기에 놓아두었다고 했다.

또 언젠가 뉴스에서 직접 봤던, 자신의 반려견을 외딴 곳에 버리고 가면서 그 순간에는 눈물을 훔치던 어떤 이의 모습. 제주 단체여행 때 살아 있는 흑돼지를 보며 귀엽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바로 다음 코스로 흑돼지 식당에 가서 고기를 맛있게 먹던 모습. 그리고 다른 나라의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한 참상이 담긴 뉴스를 보고 들으면서 자연스레 밥을 먹고, 바로 이어지는 예능이나 스포츠 프로그램을 즐기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덧붙이는 글 관련 기사의 원문은 블로그 https://brunch.co.kr/@goodtraveler78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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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행, 다시 글쓰기. 행복이 3할, 고통이 7할이라면 7의 고통을 견디려 힘쓰기보다 3의 행복을 늘이려 힘써야겠다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다시 여행, 다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