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을 만든 안판석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65세. 12일 방송계에 따르면 안 감독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이날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해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모습. 2026.8.12
연합뉴스
안판석 감독이 드라마 PD로 수련을 거친 시대는 말 그대로 드라마 황금기였고, 그가 1987년 입사한 MBC는 드라마 왕국이라 불렸다. 안 감독은 단막극 <베스트극장>을 통해 실력을 쌓았고, 그때 그 시절 흔치 않은 작가주의 감독으로 손꼽힌 황인뢰 감독의 <고개숙인 남자>(1991) 조연출을 거쳤다.
또 그 시절은 문학과 소설의 시대기도 했다. 영문학도 출신인 안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리얼리즘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드라마화해 주목받았다. 이후 일요일 아침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시절 김혜수 주연의 <짝>, 주말 드라마 <예스터데이>와 <장미와 콩나물>을 거쳐 문제작 <아줌마>를 내놓기에 이른다.
이른바 '장진구 신드롬'을 불러왔던 <아줌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안판석 월드' 1호 작품이다. 불륜이란 소재를 넘어서는 시의적절한 시대반영과 여성 인권이란 주제의식을 코믹한 서사에 녹였으며, 원미경과 강우석, 심혜진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로부터 6년 후 <하얀거탑>으로 안판석 감독은 또 한 번 도약했다. 일본 드라마보다 동명 원작 소설을 참고했다는 안 감독은 욕망이 판치는 의학 드라마를 통해 김명민(장준혁 역)이란 배우를 스타로 만들었고, 조단역에 머물던 고 이선균을 발굴했다.
작가주의와 장르물, 그리고 사회 반영 멜로 드라마
실패도 맛봤다.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통해서였다. <아줌마> 이후 주말 드라마 등을 거친 안 감독은 야심 차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남북과 통일 소재를 멜로 드라마로 푼 <국경의 남쪽>(2006)은 준수한 제작비와 한참 주가를 올리던 차승원을 주연으로 삼았으나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리고는 긴 절치부심. 영화 실패 이후 드라마 <아내의 자격>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6년이 걸렸다(2012년). 종편 출범 이후 JTBC 최고 화제작이었던 <아내의 자격>은 지금은 친숙해진 '강남 교육열' 소재 드라마의 원조격이었다.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인해 JTBC는 이후 드라마 제작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JTBC 월화드라마 <밀회> 촬영 스케치 장면.
JTBC
개인적으로, 안판석 월드의 정점은 <밀회>와 <풍문으로 들었소> 두 편을 꼽는 편이다. 예술대학 내 부조리와 촘촘해서 더 역겨운 갑을관계의 비인간성을 조망한 <밀회>는 순수한 사랑의 주체이자 스무 살 차이 나는 커플을 김희애와 유아인이 연기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 사랑이야말로, 예술이야말로 비인간성이 판치는 세상을 버텨낼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인간적이면서도 도발적이었다.
안판석 월드의 블랙코미디를 최대한 밀어붙인 <풍문으로 들었소>는 대한민국 법조계를 파헤치는 야심작이었다. 이 작품 속 대형 로펌을 운영하는 한인상 일가는 대한민국 법 위에 군림하고 정치까지 움직인다. 이들과 대척점에 선 '서봄' 가족이 혼전 임신과 결혼 스캔들로 얽히면서 벌어지는 일대 소동극인 <풍문으로 들었소>는 '세대론'에 천착해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엿보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성주 작가와 완성한 '안판석 월드'
<장미와 콩나물>을 시작으로 <아줌마>와 <아내의 자격>, 그리고 <밀회>와 <풍문으로 들었소>를 함께한 정성주 작가는 '안판석 월드'의 일등공신이자 그 세계를 함께 완성한 든든한 파트너였다는 평가다. 작가와 감독 모두 동시대 어른으로서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시각을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과 공유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안판석 감독은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멜로 드라마의 거장이라 부를 만하다. 남녀의 사랑만이 아닌 일종의 가족극과 세태극을 내포하는 멜로 드라마는 종종 계층 갈등의 장이자 '성정치학'의 텍스트로 기능해 왔다.
안 감독이 정 작가와 헤어진 후 작업한 <밥 잘 사는 주는 예쁜 누나>나 <봄밤> 역시 이러한 자장 아래 자리한 작품이다. 재벌 3세나 전문직이 아닌 평범한 2030 세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해도 계층 갈등과 직장 내 여성 처우 등등 안 감독 특유의 시대와 현실 반영하는 작품 톤은 변할 리 없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유작이 된 <연애박사>는 여전히 청년 세대와 그들의 사랑을 통해 가능성을 꿈꾸려는 '안판석 월드'의 최신작이었다. <아줌마>로부터 25년이 훌쩍 넘도록 한 우물을 판 안판석 감독. 그의 작품을 통해 울고 웃었고 많이 배웠음을 고백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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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니스트 및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전 FLIM2.0,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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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판석 감독님, 덕분에 많이 웃고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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