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드는 산> 스틸
포레스트 필름
벼랑에 몰린 인혁과 상준, 수경은 추격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곳곳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자신들 실적도 세우고 가련한 수경도 구하고 싶다. 그녀의 남편만 확보하면 대책이 나올 법도 같다. 하지만 과거 군사독재가 수족으로 활용하던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 안기부), 보안사령부 같은 조직이 무소불위 권력으로 군림하던 것처럼, 영화 속 세상에서도 그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혁과 상준은 자신들이 신봉하던, 혹은 모순을 어렴풋히 깨닫고도 일신의 안위를 위해 애써 눈감던 체제의 실체를 이제 뼈저리게 체험할 수밖에 없다. 성실하게 방첩 활동에 종사하며 평범한 시민들 위에 군림하던 작은 '권력'은 안개처럼 증발한다. 자신들의 서열을 깨닫고 오직 강요된 선택만 허용된다. 그조차 반발한다면 자신들이 '사냥'하던 이들과 같은 처지로 전락할 뿐이다. 피할 곳은 5공화국 내엔 있을 수 없다.
단 한 곳 있긴 하다. 명훈이 잠복해 있다는 '산'이다. 실제 현대사에서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된, '산악 게릴라'가 건재한 것. 일상 계엄령이 작동하는 건 간편 통제수단이지만, 실제로 굳건해 뵈는 5공화국 이면에 잠복한 취약함을 드러내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물론 영화는 21세기판 '빨치산'의 실체를 공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모호함과 환상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다. 그들은 체제를 뒤엎을 수도, 그저 연명하기 급급한 군소집단일 수도 있다.
수경 역시 단선적인 캐릭터로 묘사되지 않는다. 대개 신념을 갖고 대를 이어 반정부운동에 뛰어든 '투사'의 가족이라면 상상하는 헌신적인 조력자, 굳건한 신념의 담지자로 그녀는 고착되지 않는다. 영화는 수경을 억압 시스템에 신음하는 것을 넘어 독재 치하에서 숨죽인 채 하루살이에 만족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애써 눈감는 '희생제물'로 그린다. 이주노동자 출신에 '빨갱이'의 아내로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신세는 중세 마녀사냥의 희생양과 다르지 않다.
한국 독립영화의 틀을 뚫고 나온 보기 드문 대체역사물
근래 현대사의 암흑기를 배경 삼은 작업이 곳곳에서 시도되는 참이다. OTT 드라마 <메이드 인 코리아> 속에서 펼쳐진 세상이 현재와는 동떨어진 과거라면, 이 영화는 과감한 설정을 통해 역사책에 기술된 '종결된 과거' 더듬기를 당장 현실의 '생존'으로 전복하는 도전이다.
<숨어드는 산>은 극단적 세계의 묘사를 통해 잊힌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터널을 상기하고, 역사로만 치부하는 암흑시대를 현재형으로 되살린다. 관객은 화면에 구현된 5공화국의 (의도적으로 흑백 촬영한) 삭막한 회색빛 초상을 통해 지금 우리가 저들 상황이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질문한다. '팩션'을 칭하며 현실도피 판타지로 치닫는 것과는 정반대 보법으로 구현한 보기 드문 대체역사 장르다. 한국 독립영화에서 파격적인 장르 실험이라 해도 좋다.
치열한 정치적 상상과 더불어 감독이 공들인 장치가 풍성하다. 수많은 영화적 장치와 고전에 대한 헌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이만희, 존 웨인과 유현목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 영화광이라면 발견하는 기쁨이 짜릿할 법하다. 촬영 당시인 2020년엔 영화의 상상력이 과거 시제에 불과했건만, 6년의 산고를 거쳐 마침내 공개를 앞둔 2026년 관객에겐 12.3 내란을 거쳐 다른 차원의 감각이 추가된다. 제작 의도를 초월하는 반응과 해석이 기다려진다.
<작품정보>
숨어드는 산
A Hiding Mountain
2020 한국 드라마
2026.08.12. 개봉 105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최창환
출연 김시은, 강길우, 이한주
제작/배급 포레스트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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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