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어떻게 해야 했을까?>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04.
"답을 모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못 먹는 거잖아."
안타깝게도 영화 속에서 가족을, 부모의 결정을 변화시키는 건 설득이나 깨달음이 아니다. 마사코가 이상한 행동을 시작한 지 25년 만인 2008년에 정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은 나이가 든 어머니에게서도 보이기 시작한 치매 때문이다.
담당 의사는 당장 누나를 입원시키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보도록 권유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딸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늙어 물리적인 한계에 도달한 뒤에야 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논리와 이해가 아닌 노쇠. 이는 마사코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의료 체계 안에서 치료받기 위해서는 가족의 권력이 무너지기를 기다려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때 그의 나이가 벌써 50세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영화 후반부에 놓이는 시간 속 가족의 모습은 조금 허탈하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다. 현관문의 쇠사슬과 자물쇠가 뜯겨 나가고, 마사코가 가족과 함께 동네를 산책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상황이 호전되지만 그동안 흩어져버린 시간의 잔해를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곧 엄마가 세상을 먼저 떠나고, 누나에게는 암이 발병한다. 제때 적절한 의료 체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영상 속에 담겼을 이들 가족의 시간은, 아니 가족이 함께 경험하고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장면의 형태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05.
영화의 타이틀인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다시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시제다. 이 문장에는 과거의 시점,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미 잃어버린 삶 앞에서 과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반사실적 질문에 해당한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병원에 데려갔어야 한다'라는 대답이 누나 마사코의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생략된 주어다. '어떻게' 앞에 행위의 주체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덕분에 이 질문은 한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부모는 어떻게 해야 했을지, 동생은 어떻게 해야 했을지,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친인척이나 주변 이웃, 더 넓게는 지역사회와 의료 체계는 어떻게 해야 했을지 묻는다.
마사코 스스로에게도 어떤 선택권이 주어져야 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모의 그릇된 판단이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한 가족이 수십 년 동안 외부의 개입 없이 폐쇄적인 상태로 같은 형식의 돌봄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런 가족이 사회와 단절된 채로 그 긴 시간 동안 외로운 섬의 모습으로 남겨져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적 방치의 결과물인 셈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가 구성원 사이의 애증만으로 형성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 속 카메라는 기록된 과거를 현재의 화면 위에서 다시 움직이게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화면 내부의 장면으로 돌아가 굳게 잠긴 자물쇠를 풀어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의 행동과 결단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랜 시간 가족 내에서만 반복되어 왔던 질문을 공적인 공간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만들어서다.
너무 늦어버리기는 했지만, 마사코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한 가정의 비밀만으로 남지 않는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관계와 도움을 받아들이지 못한 형태로 굳어진 가족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믿음과 방식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대체해 버렸는지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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