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중요한 걸 알기는 아느냐'는 물음
앞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모든 콘텐츠는 원전의 이 같은 설정을 충실히 따랐다. 볼프강 페터젠의 2004년 작 <트로이>가 그러했고, 한 해 앞서 제작된 인상적 작품 <헬렌 오브 트로이>가 독자적 해석을 시도했으나 근본적으로는 호메로스가 쓴 신화적 동기에 저항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다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헬레네의 무도함이며 신들의 장난질을 수많은 희생자를 나은 10년 전쟁의 이유로 제시하지 않는다. 전쟁 아래 깔린 진실, 트로이와 서방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무역분쟁이 진짜 원인이라는 사실을 오디세우스의 말을 통하여 확인케 한다.
또한 헬레네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범해진 전쟁의 피해'에 대해 언급하고 사죄하도록 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이 전쟁이 실제로는 그녀 하나의 잘못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전쟁엔 다만 명분이 필요했을 뿐, 아가멤논과 그가 이끄는 패권국 미케네, 나아가 그에 동조하는 그리스 전역의 이익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어찌 보면 헬레네는 트로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헬레네는 당대에서는 물론이고 후세인 소크라테스와 페리클레스 같은 영웅들의 시대, 심지어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트로이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왔다. 그게 진실과 부합하는지를 누구도 충실히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럴듯한 이유면 충분하다고, 심지어 신들의 경쟁과 시기심, 인간의 미욱함이 얽혀든 이야기면 더없이 좋겠다고 여긴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헬레네에게 모든 짐을 지운 호메로스의 신화가 꼭 그에 부합했다. 그리하여 헬레네는 당대 가장 큰 전쟁의 원흉으로 남았다.
대체 무엇이 중한가. 헬레네 따위, 그녀가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오디세이아> 가운데 무어 중요하냐는 말이다. 그녀가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시안이든, 사람이든 신이든 짐승이든, 그깟 건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돼 수백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오디세이아>는 위대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호메로스는 또한 서양 문화의 원류를 연 전설적 작가로 추앙받았다. 헬레네는 그렇게 수많은 영웅의 죽음과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에 원인으로 새겨졌다.
▲오디세이포스터
유니버설 픽쳐스
죽은 고전이 아니다, 산 현실이다
2차대전 이후의 질서가 붕괴하고 전에 없던 큰 전쟁들이 인류사의 비극을 낳고 있는 오늘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등과 벌이는 전쟁이 대표적이다. 두 전쟁뿐 아니라 앞서 일어난 여러 전쟁들에서 민주주의며 평화 같은 명분이 제시됐단 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4년 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다며 그를 보호하겠단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미국은 핵 확산을 방지하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이란을 공격했다 주장하고, 이스라엘은 테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자위권 발동이라 항변한다.
제시된 명분 아래 깔린 진실은 무엇인가. 나토의 동방 확장과 그에 반해 팽창하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부닥침을 말하는 이가 있다. 베네수엘라와 이란에 매장된 막대한 석유,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에너지 운송의 문제가 또한 관련이 없다 할 수 없다. 중국과 미국의 좁아든 기술격차와 흔들리는 달러 패권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수천 년 전 그리스는 어땠을까. 오늘날 역사학계는 트로이가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요충지, 오늘날 터키 히사리크에 위치했다고 비정한다. 청동기 문명의 핵심 자원이라 해도 좋을 주석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이곳을 거쳐 그리스 사회로 들어갔다. 트로이 10년 전쟁은, 트로이에서 벌어진 그 잔혹한 학살극은 그저 헬레네라는 한 여자의 부정 때문에, 신들의 농간 탓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 헬레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흑인이건 백인이건 동양인이건, 백조의 딸이건 제우스의 딸이건 부정의 결과이건, 미녀이건 추녀이건 평범한 아낙이든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논란이 되어 마땅했던 캐스팅 문제를 돌파한 방식이 너무나 탁월하여서 조용한 극장에서 경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공유하기
크리스토퍼 놀런이 해석한 독보적 미녀, 무릎을 탁 쳤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밴드
- e메일
-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