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니언즈 & 몬스터즈> 스틸컷
유니버설 픽처스
제임스가 끝내 자기 영화를 완성하고 금빛 바나나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던 동력은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었다. 엉뚱함을 결함으로 몰지 않고 우정을 나눈 헨리, 소리 없이 끝까지 곁을 지킨 에드, 카메라를 내어준 맥스. 그를 여기까지 밀어 올린 건 이 곁들이었다. 창의는 홀로 살아남지 못한다. 그것을 '방해물'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읽어 주는 작은 원이 함께 있을 때, 겨우 도태를 면한다.
이 원을 이룬 이들이 누구인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리가 속도와 효율만 따졌다면 남과 다르게 보는 제임스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에드도 진작 걸림돌로 솎여 나갔을 것이다. 창의를 품는 원은 가장 강한 자들이 아니라 밀려나기 쉬운 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알아볼 때 생겨난다.
그리고 창의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임스가 리얼리티를 위해 끌어들인 진짜 괴물 아이린은 카메라 앞에 서기를 거부하고 도리어 세상을 집어삼키려 든다. 창작의 야심이 감당 못 할 사고를 부른 것이다. 이 재앙을 되돌리는 데는 셋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떠났던 동료들까지 새로운 빅 보스 도트와 함께 돌아오고, 미니언들은 너나없이 하나가 되어 제임스가 부른 난장을 함께 감당한다. 창의를 끝내 살려 내는 것은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그 창의가 저지른 사고까지 함께 짊어지는 여럿이다.
제임스가 한국의 교실에 떨어졌다면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상상 하나. 제임스가 한국의 교실에 떨어졌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빅 보스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섬겨야 하는 절대적 주인이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이고 돈이 되는 직업을 향해 아이들은 학원가를 뺑뺑이 돈다. 그 획일의 대열에서 엉뚱한 상상으로 효율을 떨어뜨리는 제임스는 '산만한 아이', '부적응자', '무리의 걸음을 늦추는 걸림돌'로 분류되어 조용히 밀려났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미니언들처럼 매체가 바뀔 때마다 더 크고 안전한 새 빅 보스를 향해 줄지어 달린다. 입시가 개편될 때도, 산업이 재편될 때도, 이제 AI가 숙련의 값을 다시 매기는 국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끝없는 경쟁 속에서 정답만 제출하도록 강요받는 사이, 아이들의 순수한 관점은 깎여 나간다. 그렇게 창의를 빼앗긴 채 어른이 된 뒤에야 사회는 다시 "창의적 인재가 되라"고 몰아세운다. 어릴 때부터 날개를 접어 두도록 길들여 놓고, 다 커서 왜 날지 못하느냐 따지는 격이다. 정작 나는 법은 누구도 일러 주지 않으면서.
영화가 끝나고 씁쓸한 부러움이 남는다. 제임스 곁에는 카메라를 쥐여 준 맥스와, 끝까지 함께한 헨리와 에드가 있었다. 우리에게 그런 울타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K-컬처가 증명하듯, 이 사회의 창의적 역량은 이미 세계를 흔든다. 다만 그 울타리는 대개 대열에서 끝까지 버텨 낸 소수에게, 그것도 한참 늦게야 열린다. 교실의 모든 제임스에게 처음부터 주어지는 기본값은 아니다. 격변과 도태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경주로가 아니라 밀려나기 쉬운 재능일수록 일찍 붙들어 주는 작은 원이다. 그 원을 언제, 누구에게 열 것인가. 그 선택이 결국 다음 세대의 창의가 살아남을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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