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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의 <호프>, 이거 하나는 인정한다

희망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이기도... 공포와 희망을 직접 마주하시길

26.07.21 11:22최종업데이트26.07.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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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언제 희망을 느끼게 될까. 어쩌면 희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가다 보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 멈춰 서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은 희망을 찾기보다 살아남는 것부터 생각하게 된다. 희망은 여유로운 순간이 아니라,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내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호프>의 제목은 더욱 흥미롭다.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을 추격하고,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들의 공포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잠시 괴물을 쓰러뜨렸다는 안도감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간들이 품었던 희망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영화의 마지막에도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희망을 잃어가는 것은 인간이었고, 오히려 희망을 품는 것은 외계인이었다.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통해 '희망'이라는 감정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첫 번째 감정] 범석의 공포

 영화 <호프> 장면
영화 <호프> 장면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범석(황정민)은 작은 시골 파출소의 소장이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세상을 구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평범한 경찰이다. 그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 그의 반응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총을 겨누지만 확신은 없고, 맞서 싸우려 하지만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영화는 범석이 공포를 느낀 순간들을 길게 담는다. 공포라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과정을 화면에 표현해낸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공포를 통해 살아남아 왔다. 불을 두려워하고, 어둠을 경계하며,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피하는 본능. 범석이 보여주는 떨림은 비겁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장 오래된 생존 방식이다.

특히 한 시간 가량 진행되는 첫 번째 추격 시퀀스는 압도적이다. 관객 역시 범석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무엇을 쫓고 있는지도, 무엇에게 쫓기고 있는지도 완전히 알지 못한 채 마을에서 벌어지는 추격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는 정보를 바로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두려움은 더 극대화된다. 공포는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나홍진 감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감독은 범석의 얼굴을 통해서 그 공포를 온전히 전달한다.

[두 번째 감정] 성애의 분노

 영화 <호프> 장면
영화 <호프> 장면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성애(정호연)는 범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외계인을 마주한다. 그녀는 두려움보다 먼저 행동으로 그에 맞선다. 처음 본 외계인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들고, 거침없이 총을 겨눈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강렬한 에너지가 화면을 장악한다. 그녀가 경찰차를 몰고 오다 멈춰서 저 멀리에 보이는 외계인에게 총을 쏴대는 순간, 그동안 관객이 해소하지 못했던 카타르시스가 방출된다.

성애를 움직이는 것은 용기보다 분노에 가깝다.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절규는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이다. 이유도 없이 일상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며,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에게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그녀의 분노는 외계인을 향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향한 저항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성애를 단순한 액션 히어로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 역시 인간이다. 분노는 공포를 잠시 잊게 만들 뿐, 절망을 없애주지는 못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자 절망의 크기는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지를 다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성애가 보여주는 거친 에너지는 인간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의지처럼 다가온다.

[세 번째 감정] 외계인의 희망

 영화 <호프> 장면
영화 <호프> 장면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가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이다. 그동안 인간을 따라가던 시선은 갑자기 외계인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밴더)와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로 향한다. 관객은 지금까지 그들을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만 바라봤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처음으로 그들의 사연과 감정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순간 관객은 어떤 상황인지 혼란을 느낀다.

그들의 눈앞에서 거대한 외계 함선은 추락하고, 아이를 잃은 슬픔은 깊다. 그들의 세계 역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베이요와 조르는 절망 속에서 서로의 의지를 다잡는다.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특히 자신의 심장을 꺼내는 마베이요의 선택은 단순한 희생이라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결심처럼 느껴진다. 바로 그 순간 화면에 떠오르는 제목 'HOPE'. 영화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목의 의미를 관객에게 건넨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에서 희망을 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인간들은 괴물을 쓰러뜨리고 나서 잠시 안도하지만,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범석은 '정리가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저 달려갈 뿐이다. 희망을 잃어가는 인간과,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의지를 세우는 외계인의 모습은 선명한 대비를 만든다.

그래서 영화의 중심은 마지막에 인간에서 외계인으로 옮겨간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바라봤지만, 영화는 마지막 몇 분에 그 틀을 뒤집는다. 처음에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존재 역시 가족을 잃고 슬퍼하며,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순간 영화는 침공 영화에서 벗어나 하나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결국 영화가 말하는 희망은 승리해서 얻는 감정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선택하는 의지에 가깝다. 희망은 종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외계인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우리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희망은 절망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다

<호프>는 단순한 외계인 침공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인간과 외계인의 대결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절망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들여다본다. 희망은 승리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나홍진 감독의 연출은 이번에도 압도적이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외계인의 실체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한 공포와 서스펜스를 끝까지 유지하는 방식은 그가 가장 잘하는 연출이다.

첫 번째 추격 시퀀스는 숨을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긴장감이 뛰어나고, 숲속에서 이어지는 액션 역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마지막 도로 추격 장면은 다소 길게 느껴지고 일부 CG가 눈에 띄는 아쉬움은 있지만, 영화 전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거대한 재난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완성도 높은 미술과 음향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나홍진 감독 특유의 공간 활용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난다. 평범한 시골 마을은 어느 순간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간으로 변한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황정민은 평범한 인간이 절망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정호연은 강렬한 에너지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준다. 특히 조인성이 말을 타며 총격전을 펼치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액션 시퀀스 중 하나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배우의 존재감이 완벽하게 맞물린다.

물론 호불호는 분명 갈릴 작품이다. 이야기의 결말이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방식은 아니며, 일부 CG 역시 완벽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미쳤다'고 극찬할 것이고, 또 다른 관객은 같은 표현으로 혹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홍진 감독은 또 한 번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스케일과 상상력을 스크린 위에 펼쳐냈다.

결국 <호프>가 던지는 질문은 절망적인 재난 속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가일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순간, 과연 다시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만들 수 있을까. 영화가 말하는 희망은 결과가 아니라 선택이다. 어쩌면 그 선택은 영화에서 외계인이 먼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호프>는 마지막 장면이 끝난 뒤에도 오래 마음속에 남는다. 꼭 극장에서 이 거대한 공포와 희망을 직접 마주해보길 추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호프 나홍진 황정민 정호연 조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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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영화와 시리즈 속 감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단순한 이야기보다, 우리의 삶과 감정을 비추는 거울처럼 바라봅니다. 브런치에 영화 감성 리뷰와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으며, 영화 속 감정을 담은 첫 에세이집 《그럴 때, 나는 그를 떠올렸다》를 출간했습니다. 레빗구미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남긴 감정과 삶의 이야기를 오래 기록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