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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과 아내의 죽음, 그때 우리가 잃게 되는 것

[넘버링 무비 546] 영화 <미명>

26.07.20 17:37최종업데이트26.07.2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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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명> 스틸컷
영화 <미명> 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당신이야? 지금 여기 있는 거야?"

2024년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 몽골사를 연구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남자(이원영 분)는 생일을 맞아 아내(임정은 분)가 차려준 아침을 먹으며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집을 나선 아내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일상은 한순간에 멈춘다. 장례를 치른 뒤 남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어증에 걸리고, 기계음에 의지해서만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죽은 아내의 흔적이 집 안에 번지는 희미한 빛과 낮은 허밍을 통해 감지된다. 남자는 아내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잃어버린 목소리를 대신할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영화는 계엄 선포 직후 아내를 잃은 한 남자가 말과 일상,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꿈꾸었던 미래까지 차례로 잃어가는 시간을 따라간다.

영화 <미명>을 처음 마주한 것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였다. <희망의 요소>와 <절망의 요소> 등의 작품을 통해 현실을 낯선 방식으로 재구조화해 온 이원영 감독이 비상계엄 직후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실제로 마주한 영화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비상계엄이라는 국가적 사건을 아내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감각을 통해 풀어내면서, 사건을 직접 재현하지 않고도 그날 이후 우리가 공유하게 된 감정에 정확히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미명>은 당시의 광경이나 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하는 방식 대신, 그 이후에도 남아 있는 낯섦과 불안한 감각에 주목한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세계를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된 사람의 상태를 시각과 소리로 옮겨놓는 것이다.

02.
이원영 감독은 계엄이 선포되던 시각, 지방에서 강의를 마치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회상한다. 평소와 달리 텅 빈 도로 위에서 그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낯섦을 느꼈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현실과 마주했다고 한다. 당시 경험한 감각은 이 영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는 영화가 비상계엄이라는 공적 사건을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사적 상실과 나란히 놓는 이유와도 맞닿는다. 국가의 질서가 흔들리는 일과 부부의 일상이 무너지는 일은 분명 서로 다른 원인과 규모에 속하지만, 두 사건이 한 인간에게 남기는 감각의 형태는 닮아 있다. 당연하게 계속되리라 믿었던 세계가 예고도 없이 중단되고, 이후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이다.

급하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선 남편이 시간이 흐른 뒤 검은 정장을 입고 돌아와 바닥에 엎드려 우는 장면 이전을 돌이켜보면 좋겠다. 아내는 혼자 식사할 남편을 위해 아침상을 차리고, 생일을 맞은 그와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식탁을 정리하고, 두 사람은 이것이 마지막 아침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이어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이 모든 시간을 단숨에 회복할 수 없는 과거로 만든다. 평범함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지금의 생활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사건은 그 지속 가능성을 훼손함으로써 특별하지 않았던 일상의 동작들을 뒤늦게 상실의 증거로 바꿔놓는다.

식탁 너머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비상계엄 속보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일상을 절단한다. 민주적 제도와 헌정 질서가 위협받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언제나 존재했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한밤중의 선언이 되어 우리의 일상에 도착하리라고는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건은 당연하게 여겨온 질서가 단 한 사람의 결정과 짧은 선언에 의해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아내의 죽음과 계엄 선포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으며, 영화 또한 두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미명>은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는 관계와 제도가 생각보다 연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사건이 남기는 공통의 감각으로 포착한다. 한 사람의 부재가 부부의 사적인 세계를 무너뜨리고 계엄 선포가 그들이 살아가는 공적 세계의 안정성을 흔들면서, 서로 다른 규모의 두 붕괴는 한 집의 식탁과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영화 <미명> 스틸컷
영화 <미명> 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03.
아내의 장례를 치른 뒤 남편은 목소리를 잃는다. 병원에서도 뚜렷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그는 기계음을 빌려 대화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러한 목소리의 상실은 텔레비전과 휴대전화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발화와 대조를 이룬다. 계엄 이후 뉴스와 정치의 언어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책임의 소재를 둘러싼 각기 다른 목소리를 쏟아낸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해도 그날 밤 사람들이 느꼈던 불안과 낯섦까지 모두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슬픔 역시 사고의 원인이나 죽음의 경위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건에 관한 말은 넘쳐나지만, 정작 사건을 겪은 한 사람의 몸에서는 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역사학자이자 교수라는 설정은 이러한 대비를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그는 몽골의 역사를 연구하고, 자신이 이해한 맥락을 학생들에게 언어로 전달해 온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상실 앞에서는 사건을 설명할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지식도 아내의 죽음이 남긴 감각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꾸어주지 못한다. 아내가 왜 죽었는지를 아는 것과 그 죽음 이후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여서다. 기계음은 몸이 거부한 발화를 대신하며 그가 사회와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돕지만,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온기와 떨림, 숨결과 같은 비언어적 요소까지는 전달하지 못한다. 문장의 의미는 도착해도 그 문장을 말하는 몸의 상태는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소리를 영화의 중심으로 옮겨오는 동안 화면은 인물의 얼굴을 오롯이 비추는 일에서도 거리를 둔다. 첫 장면부터 카메라는 두 어린이를 화면 안에 붙잡아두는 대신 부부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고, 이후에도 인물의 정면보다 등과 어깨 뒤에 머무르거나 유리에 반사된 희미한 형상을 포착한다. 목소리를 잃은 남편은 화면 안에서도 점차 명확한 형태를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아내가 혼령처럼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그것이 실제 존재인지 남편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영인지는 확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내의 존재가 객관적인 현실인가가 아니라 남편이 희미한 빛과 낮은 허밍을 하나의 응답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미명>의 인물들은 선명한 얼굴과 목소리 대신 반사된 형상과 어둠 속의 빛, 언어가 되기 이전의 소리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한다.

 영화 <미명> 스틸컷
영화 <미명> 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04.
"당신이 맞다면 제발 센서등을 켜 줘."

남편이 휴대전화의 기계음에 머무르지 않고 몽골의 전통 발성인 '흐미'를 배우려는 것은 그래서다. 그는 잃어버린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는 목적이 아닌 죽은 아내와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새로운 소리를 얻고자 한다. 그가 여전히 부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자, 부재한 존재의 목소리를 자신의 몸 안에 남겨두려는 애도의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이 시도를 곧바로 삶을 향한 회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남편이 되찾고자 하는 소리는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말이 아니라 죽은 아내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애도 서사에서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행위는 남겨진 이가 부재를 받아들이고 다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미명>에서 남편은 아내의 부재를 인정하기보다 그 부재가 발생하지 않은 관계의 형식을 다시 만들고자 한다. 흐미는 죽은 사람을 과거에 남겨두는 소리가 아니다. 도리어 그를 현재로 다시 불러내려는 소리에 가깝다.

영화 후반부에서 남편이 번개탄을 피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선택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처음부터 아내를 따라 죽기 위해 흐미를 배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내를 기억하며 살아가려는 마음과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그에게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내와 다시 대화하려는 시도는 그를 삶에 붙잡아두는 마지막 행위인 동시에 죽음 쪽으로 이끄는 통로가 된다. 흐미는 살아 있는 몸에서 발생하지만 그 소리가 부르는 대상은 죽은 사람이며, 남편이 아내에게 가까워질수록 살아 있는 세계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영화는 그런 그를 손쉽게 치유하거나 사회로 복귀시키는 선택 대신, 한 세계를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졌을 때 회복과 소멸이 얼마나 닮은 모습일 수 있는지를 끝까지 지켜보고자 한다.

05.
남편의 죽음 이후, 영화는 이제 막 계엄이 선포되던 날 밤 아내 역시 살아 있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서사적으로는 과거의 사건을 뒤늦게 보여주는 플래시백이지만, 이 장면이 수행하는 기능은 일반적인 회상보다 복잡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과거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앞으로 갖고 싶은 아이와 계속될 사랑, 함께 살아갈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는 과거를 보여주면서 정서적으로는 끝내 실현되지 못한 미래를 말하고 있다. 이미 아내와 남편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에서 행복했던 추억보다 사라져 버린 가능성을 먼저 보게 된다. 이 장면을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라기보다 상실된 미래를 품고 있는 플래시백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

출산과 사랑에 관한 대화가 영화의 앞부분에 위치했다면 그것은 이후의 비극을 예고하는 장치로만 기능했을 것이다. 일종의 복선이다. 하지만 <미명>은 두 사람의 죽음을 먼저 보여주고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야 그들이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공개한다. 아이를 낳을 것인지 고민하는 대화와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더 이상 삶의 계획이 아닌 실현되지 못한 시간의 유품이 되고 만다. 영화는 죽음을 통해 상실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 뒤, 플래시백을 통해 그 죽음과 함께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뒤늦게 드러낸다. 남편이 생을 마감하면서 사라지는 것 역시 고통받는 한 사람만은 아니다. 아내와 함께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두 사람이 꿈꾸었던 미래를 증언할 마지막 사람도 함께 사라진다. 남편의 죽음 이후 삽입된 과거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기억의 공간이면서, 더 이상 어느 당사자의 기억에도 남을 수 없는 미래의 무덤이 된다.

 영화 <미명> 스틸컷
영화 <미명> 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06.
이제 <미명>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희망의 이미지로 읽기 어려워진다. 영화의 영어 제목인 'Glimmering'이 가리키듯, 여기에서의 미명은 어둠을 완전히 밀어내는 빛이 아닌 그 안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밝음에 가깝다. 아내의 형상은 빛의 굴절 속에서만 나타나고, 남편은 그 빛을 따라 아내와 접촉하려 한다. 그리고 그 만남의 끝에는 남편 자신의 죽음이 놓여 있다. 빛은 그렇게 살아 있는 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신호인 동시에 죽은 아내에게 다가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미명>의 빛은 희망과 파국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도 안정적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어둠의 종말을 알리는 빛보다는 사라진 존재의 형상을 잠시 구별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밝음에 가깝다.

결국 이 영화가 12. 3 비상계엄의 감각을 아내의 죽음으로 풀어내는 까닭은 정치와 사랑의 속성이 동일해서가 아니다. 두 사건 모두가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를 믿게 하는 기반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이 계속 곁에 있으리라는 기대 위에 놓이고, 사회는 타인들과 공유하는 질서가 내일도 유지되리라는 믿음 위에 놓인다. 영화는 아내의 죽음이 무너뜨린 관계적 세계와 계엄 선포가 흔든 공적 세계를 인과적으로 묶는 대신, 한 사람의 몸과 하나의 집 안에서 동시에 울리게 한다. 세계의 붕괴는 때때로 거대한 전조가 아닌 작은 파열음을 통해 도착한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잃는 것이 현재를 딛고 언젠가 도착하리라 믿었던 미래와, 아직 경험하지 않았지만 이미 서로의 약속 안에서 살아 있던 시간 모두가 된다. 영화 <미명>의 빛은 새로운 아침의 도착을 약속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이 끝내 살아보지 못한 미래의 윤곽만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춰내고 있다.
영화 미명 계엄 이원영 임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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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