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사실 낯익은 논리다. 나홍진 감독은 전작 〈곡성〉에서 이미 이 논리로 사람을 죽였다. 딸이 이상해지자 종구는 눈앞의 증거들을 놓치고 대신 여러 말들에 휘둘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대가로 그는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나홍진의 세계에서 증거 없이 무언가를 믿는 일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나홍진은 두 영화에서 똑같은 장치를 쓴다. 성경의 언어를 인간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곡성〉의 정체불명의 외지인이 그랬고, 〈호프〉의 조르가 그렇다. 조르의 말에는 분명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숙연함이야말로 감독이 놓은 마지막 덫이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던 존재를 괴물로 몰아붙였다가 말이 통하는 순간 이번엔 성급히 그를 우러러본다. 방향만 반대일 뿐, 보지 않고 이름부터 붙이는 손놀림은 똑같다.
대칭이 드러난다. 인간은 눈앞의 존재를 보지 않았다. 보기도 전에 '호랑이'와 '괴물'이라는 이름이 준비돼 있었으므로. 조르 역시 눈앞의 참상을 보지 않는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으므로. '쿠얼'과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조르는 이 준비된 이름들을 폐허 위에 얹어 눈앞의 죽음을 시련으로, 학살을 지나가는 그림자로 번역한다. 인간은 낯선 것을 끌어내려 괴물로 만들었고, 조르는 참상을 끌어올려 섭리로 만든다. 양쪽 다 준비된 이름으로 눈앞의 것을 덮는다.
누구도 악의는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조르의 대사 안에서 발화된다. "내가 바라는 것", 곧 '호프'다. 그리고 그 정의가 잔인하다. 희망이란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 다시 말해 증거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원문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그러니 〈호프〉가 말하는 희망은 구원이 아니다. 눈앞의 것을 보지 않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호포항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희망은 있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겠다는. 그래서 보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면 저것은 괴물이어야 했으니까. 조르에게도 희망이 있다. 그래서 참상을 증거가 아니라고 한다.
영화 후반부, 외계인들은 남은 시간을 '몰리'라는 단위로 센다. 3 몰리가 남았다고 한다. 관객들은 이 낯선 단어를 파고들었다. 나 역시 그랬다. 무슨 뜻일까, 얼마의 시간일까. 자막이 채 식기도 전에 의미를 달려고 안달했다. 나홍진 감독은 이미 밝혔다. 자기도 뜻을 모른다는 의미에서 '몰라'를 비틀어 '몰리'로 만든 말이고, 구체적인 기간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뜻은 없었다. 우리가 달려던 이름만 있었다. 그 낯선 말에 기어이 뜻을 얹으려 한 손이, 소의 사체 위에 '호랑이'를 얹은 청년의 손과 같았다.
자막이 없을 때 우리는 저것을 괴물이라 불렀다. 자막이 켜지자 신이라 불렀다. 그리고 뜻이 없는 자리에까지 뜻을 불렀다. 세 번 다 이름부터 붙였고 그때마다 그 이름 밑에 있던 것을 지웠다. 아이를 잃은 부모를, 우리와 똑같이 눈먼 얼굴을, 그리고 아무 뜻도 없다는 텅 빈 사실을. 이름은 언제나 무언가를 덮으려고 온다.
그런데 영화는 조르의 대사로 끝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던 중, 쿠키 한 장면이 남는다.
끝까지 사람들은 헛것을 봤다. 보이는 것마다 틀린 이름이 붙었다. 그 오인의 폐허 위로 성기가 걸어온다. 혼자 서 있기도 힘든 몸을 무언가에 겨우 기댄 채, 안간힘을 쓰며. 대사는 없다. 괴물도 신도 값도 뜻도 없다. 그냥 살아서 걷는 몸 하나다.
그 위로 "HOPE"라는 제목 텍스트가 화면을 꽉 채운다. 감독은 제목을 조르에게 주지 않았다. 눈앞의 것을 보지 않아야 얻는 희망, 이름을 참상 위에 얹어야 얻는 희망, 그 어두운 희망 위에 제목을 얹지 않았다. 이름을 얹는 자가 아니라 이름이 다 벗겨진 자에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믿지 못한 채 그저 살아 돌아온 몸에게 주었다. 온 마을이 헛것에 이름을 다는 동안, 성기는 아무 이름 없이 걷는다. 그것이 이 영화가 허락한 단 하나의 예외다.
우리는 뜻을 얹으려 했지만 정작 제목은 아무 이름도 얹히지 않은 한 사람의 걸음 위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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