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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꺼낸 '호프',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넘버링 무비 545] 영화 '호프'

26.07.16 16:22최종업데이트26.07.1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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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01.
"괴물이야. 겁나게 큰 괴물…"

예비군이라고는 여덟 명뿐인 호포항은 외부의 위협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논 한가운데 거대한 무언가에 할퀸 상처를 입은 소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소동이 시작된다. 맹수가 배를 채우기 위해 공격했다고 볼만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마을 청년 성기(조인성 분)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은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직감하고 순찰차를 몰아 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에는 사건의 원인을 알려줄 단서 대신 무너진 벽과 피를 흘린 주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범석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인간의 상식과 크기를 훌쩍 넘어선 존재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2016)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영화 <호프>는 외계 생명체의 출현을 다루면서도, 거대한 우주보다 폐쇄된 시골 마을의 혼란을 먼저 바라보는 SF영화다. 영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난 순간보다 그 대상을 이해할 언어와 방법을 갖지 못한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지에 더 오래 머문다. 좁은 길과 논밭을 가로지르는 추격, 육체를 무자비하게 훼손하는 폭력의 이미지는 인간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큰 존재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드러낸다.

02.
영화는 대체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카메라가 어떤 인물을 비추고 프레임의 중심에 놓으면 그가 중요한 대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이유다. 사건 또한 마찬가지다.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이야기의 핵심일 가능성이 크다. 물리적 제약을 이유로 스크린은 언제나 세계의 일부만 관객에게 전달하지만, 그 일부가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이를 처음부터 의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의 흔적이며, 화면에 오래 머무는 인물 역시 목격자의 위치에 가깝다. 프레임 내부의 모든 과정이 역시 중요해 보이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기분이다.

실제로 영화의 전반부(탱크로리가 전복 되기 전까지)에 해당하는 1시간 가량의 프레임 속에는 거대한 공백이 존재한다. 죽은 소의 몸에는 정체 모를 대상이 남긴 흔적이 존재하고, 마을 곳곳에서는 누군가 쫓기고 죽고 무언가 부서진다. 영화는 범석의 뒤를 쫓아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매번 사건보다 조금 늦게 도달한다. 종국에 마주하게 되는 외계인의 존재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앵글 바깥에 감춰지고, 관객은 내내 빠져나갈 수 없는 불확실성에 갇히고 만다.

여기에서 의도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공백이 어둠이나 안개와 같은 시각적 장애물을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대낮의 소동은 이 영화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밝음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공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명백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사건의 핵심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03.
전반부의 첫 번째 괴물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지난한 추격 속에서 화면 안의 인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영화 <호프>를 지탱하는 세 인물은 범석과 성기, 그리고 성애(정호연 분)다.

나홍진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도록 세트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계속 달려 나가는 범석, 타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성애, 위협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숲으로 향하는 성기의 모습을 통해서다. 표면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그들의 용기나 선의가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사건의 전모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전체를 이끄는 미끼가 된다.

모범이 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범석이 마을을 지키려는 마음은 진짜고, 성애는 실제로 누군가를 살리며, 성기의 분투 역시 생존을 위한 필사의 행위다. 하지만 이들의 절박한 몸부림을 따르는 동안 관객은 자신이 누구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지 잊게 된다. 이들에게 시선이 붙잡히는 동안 화면 밖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의 사연에서도 멀어지게 되는 셈이다.

프레임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가짜라거나 중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주인공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드는 시각적 장벽에 가깝다는 의미다. 너무 긴박해서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는 것. 이 지점에서 영화의 관점은 극 중 호포 사람들의 시선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당장 내 앞의 위협을 제거하고 희망을 품기 위해서 위협이라고 부른 존재가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지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후반부로 접어들어 외계인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그 믿음은 강화된다. 외형이 확인되는 순간 인간 무리는 이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괴물'이라고 부르던 존재가 '외계인'이라는 존재로 전환되자마자 남은 과제는 이들을 사살하여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된다. 하지만 이들은 단 한 번도 이들이 왜 지구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마을을 공격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은 의문이 해소될 일도 없다.

우주선을 처음 발견한 성기 무리 역시 '돈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침입을 선택한다. 이러한 태도는 후반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액션과도 맞닿아 있다. 이들에게 외계인은 더 이상 해석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총을 쏴 죽어야 하는 표적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그 단순한 구조적 회로에 갇히게 된다. 프레임 내부만 들여다보게 만들어서 그 바깥에 놓인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미끼의 화려한 몸짓에 현혹되는 것이다(전반부의 바깥에는 괴물의 육체가 있고 후반부의 바깥에는 그들의 목적이 있다).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04.
"아까 그 놈은 지 새끼를 찾으려고 그랬던 거네."

후반부에 밝혀지는 외계인의 목적은 그동안 보아온 영화를 근본적으로 다시 쓰게 만든다. 이들이 호포항을 찾아온 이유는 정복도 학살도 아니며, 목수 양배(음문석 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이를 찾고 살리기 위함이다. 외계인의 시선에서 본다면 호포항 사람들은 마을을 침범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아이를 죽인 종족이자 그 아이를 찾으러 온 가족에게 총을 겨누는 존재다. 인간에게는 침공처럼 보이던 사건이 외계인에게는 구조와 수색, 나아가 애도의 과정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극 중 모든 추격과 전투는 그 사실을 모르는 쪽의 시선으로만 편집된 결과에 가깝다.

반전 따위가 아니다. '외계인이 인간을 공격했다'는 문장이 주체가 바뀌면서 '아이를 찾던 외계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에 맞선다'로 고쳐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포항 사람들에게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울 순 없겠으나,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완전히 무고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다. 마을을 지킨다는 영웅적 행동 역시 더 큰 시야에서는 오해를 확대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양배라는 인물 또한 거악을 계획한 빌런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양배가 모든 사건의 원인이면서도 전형적인 악당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은 <호프>가 비판하는 대상이 개인의 사악함이 아닌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여서다.

05.
"이건 말도 안 돼요. 있을 수도 없어요."

그런 양배의 행위가 영화의 가장 안쪽에 감춰진 채로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여기에 영화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존재한다. 관객이 두 시간이 넘도록 마주하는 것은 양배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다. 원인이 아닌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그 결과를 원인처럼 믿게 만드는 방식이다. 영화의 프레임 내부가 폭발과 총격과 같은 폭력으로 가득하지만, 그 폭력을 발생시킨 최초의 오해나 상실이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눈앞의 공격만을 기억하고 자신이 받은 피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상대편에도 잃어버린 아이와 돌아가야 할 가족, 실패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배제해 버리는 것이다. 현실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보자면, 영화 <호프>는 인간이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관습적인 행태를 극단으로까지 치밀어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에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이 지난 140여 분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두 집단의 전투가 끝난 뒤에야 영화는 비로소 그 전투가 속해 있던 더 큰 이야기의 일부를 꺼내 보인다. 일부 속편을 위한 예고처럼 느껴지지만, 그보다는 지금까지 인간의 프레임만이 전부라고 믿어온 관객을 화면 바깥으로 밀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점 이동이 된다.

영화 <호프>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의 모든 형상과 행동을 보여준 뒤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다.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쪽에도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한 믿음.

 영화 <호프> 스틸컷
영화 <호프>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06.
그렇게 미끼를 따르는 동안 감춰져 있었을 뿐이지, 극 중 모두에게는 각자의 희망이 존재한다. 마을을 구하고자 하는 호포항 사람들의 희망, 살아 돌아오고자 하는 숲속 청년들의 희망, 그리고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외계인의 희망이다. 다만, 서로의 자리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각각의 희망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형태로 마주치면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가 과연 희망을 말하는가?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요원한 단어일 것이다.
영화 나홍진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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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