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길스틸컷
디오시네마
흔한 장르물과 달리하는 궤
통상의 영화라면 죽은 아이와 주인공인 어른 사이의 유대를 충분히 보여줄 테다. 그를 바탕으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분노와 같은 감정과 감각을 일깨울 것이다. 복수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을 충실히 설명하며 관객과 동일 시된 주인공의 복수로부터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려 한다. 이로부터 얻어지는 쾌감이 장르의 목적이며, 이에 이르는 길이 장르의 전형으로 확립돼 있는 것이다.
<뱀의 길>이 걷는 길은 다르다. 영화의 시작점엔 아버지와 아이의 유대가, 또 납치부터 고문에 이르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제반 정보 없이 다짜고짜 복수부터 들어간다. 미야시타와 그를 돕는 니지마가 어떤 사이인지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복수극을 도운 뒤 제 삶으로 돌아간 니지마가 수학처럼 보이는 미지의 학문을 학원 같은 곳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반복해 꽤 오래 보여주기도 한다. 범죄와 학원이라니, 이 얼마나 낯선 조합인가.
미야시타와 니지마 사이엔 이렇다 할 감정적 교류가 없다. 이따금 둘 사이에 스킨십이며 말들이 오갈 때도 신뢰가 전혀 없는 모습을 도리어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악역인 야쿠자 조직원들 사이엔 의리와 신뢰, 애정이 확인된다. 동료가 죽은 뒤 절규하는 모습이나 납치된 동료를 구하려 동분서주하는 모습 등을 힘주어 연출한다.
수십 명이 죽어나가도 악역은 악역일 뿐인 그렇고 그런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악역 한 명 한 명이 사람이며 사연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두목 격인 이는 장애가 있는 여성이고, 그 주변을 지키는 이들과 특별한 유대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이들에게 딸이 살해당했다며 복수하는 이는 제정신도 아닐뿐더러 비호감이기까지 하다. 대체 왜 이렇게 그린 것일까.
이와 같은 흔치 않은 설정과 연출이 구로사와 기요시란 작가의 존재감을 되새긴다. 흔한 장르물의 영역에서조차 그렇고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는 이, 덕분에 관객은 그냥 장르물이 아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소비한다.
▲뱀의 길스틸컷
디오시네마
구로사와 기요시가 작가라 불리는 이유
구로사와 기요시는 1955년생, 일흔의 노감독이다. 할리우드에선 스티븐 스필버그를 필두로, 마틴 스콜세지, 조지 밀러,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은퇴시기를 훌쩍 지난 나이든 감독이 활발히 활동하는 게 흔한 일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일흔줄에 접어든 현역 감독의 존재가 귀한 것이 사실이다.
시나리오는 물론, 촬영과 미술, 연기 등 다양한 영역을 두루 이해하고 지휘해야 하는 데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흐름 또한 따라잡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다. 제작부터 배급에 이르는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을 이끌어가는 데도 적잖은 힘이 소모된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같은 감독이 있고 없음이 오늘의 한국과 일본 영화계의 차이를 보여준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걸어온 길을 보자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필모그래피의 시작을 보자. 데뷔작 <간다가와 음란전쟁>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핑크무비다. 일본 영화계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핑크무비는 남성 관객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데 치중하는 야한 영화를 이른다. 전면적인 성애 묘사가 등장하진 않는단 점에서 포르노와, 오로지 성적 자극에만 매몰되지 않는단 점에서 에로 영화와 구분된다. 서양에선 로망포르노와 같은 장르가 한때 흥한 적이 있다지만 일본의 핑크무비처럼 하나의 성공한 장르로 오래 지속되진 못하였다.
▲뱀의 길포스터
디오시네마
일본엔 있고 한국엔 없는 것
핑크무비는 공포 영화와 함께 신인 감독이 적은 예산으로 상업적 성공과 영화적 성취를 함께 거머쥘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르물이다. 그 덕에 적잖은 감독이 핑크 무비로 영화 연출을 시작해 주류 영화계에 안착하기도 했는데,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 대표 주자다.
꽤 가능성 있는 청년 영화인이던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핑크 무비만 선택지였던 건 아니다. 다른 장르물 제안도 없지 않았으나 그 스스로가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장르에서 출발하기를 선택했다고 전한다. 미국 B급 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리처드 오언 플라이셔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롤모델인 걸 보면 기성 영화계가 따지는 장르의 품격은 그에겐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핑크무비로 시작해 공포와 범죄, 스릴러 등에 이르는 필모그래피를 그려온 구로사와 기요시다. 무게 잡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기회만 기다리는 대신, 더 많은 관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주어진 범위 안에서 제 색깔을 발하기를 택해왔다. 장르적 문법을 답습하지 않고 독창적인 시도를 거듭해온 그의 가치를 마침내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오늘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그의 영화를 소환해 한국 극장에 거는 것도, 영화팬들이 그 작품을 보러 걸음 하는 것도 그래서다.
주류라 불리는 흐름 밖에도 예술은 있다. 핑크 무비며 공포 영화와 같은 장르물 안에도 예술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오늘의 구로사와 기요시를 만들었다. 불과 십 수 년 전 '몰락했다'고,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던 일본 영화가 오늘에 이르러 각광 받는 작가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는 데는 주류 바깥에서도 숨 쉴 자리가 있는 일본 영화의 폭넓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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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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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판이 깬 장르 공식, 구로사와 기요시의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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