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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독립영화 관행 부수고자 의기투합한 남녀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지구 최후의 여자>

26.07.08 20:24최종업데이트26.07.0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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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전공자를 위한 지역 미디어센터 영화 시나리오 워크숍. 유독 튀는 두 수강생이 있다. 강사와 동료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수렴하는 시간에 둘은 골칫덩어리다. '구한아'는 남자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지구 최후의 여자> 시나리오를 고수한다. 뭔가 사연이 있는지 독기를 품은 그녀 앞에서 다들 감히 건드릴 엄두도 못 내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감독 지망생 '송철'만 왜 그렇게 남성 혐오에 집착하냐며 의견을 낸다. 강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다.

그런 송철의 시나리오 역시 강사에겐 한숨만 거듭 나올 따름이다. '독립영화 제작기를 독립영화로 만들어 독립영화제에서 독립영화인이 절대다수인 관객 앞에서 상영하고, 그들과 함께 뒤풀이하러 가는' 행태가 진저리난다며 상업영화 스타일에 치우친 누아르 복수극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내 공모전에 낙방하자 그는 나름대로 묘안을 짜낸다. 독립영화 지원사업 평가 기준에 포함된 여성 가산점 확보차 한아에게 협업을 제안한 것. 오월동주도 이런 게 없다.

상극인 두 사람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필름초이스

<지구 최후의 여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상극인 두 사람이 협력하는 이야기다. 처음엔 극악의 상성이지만, 묘하게 둘은 계속 부대낄 운명이다. 요즘처럼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상종하지 않는 시절에 희귀한 인연이긴 하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면 한 사람은 너무나 속이 투명하고, 다른 사람은 사연이 꽤 깊은 듯하다. 송철이 겉으로 내세운 의도는 극한의 실용주의다. 번번이 지원사업 낙방이라 가산점 덕 좀 보겠다는 것. 한아로선 기가 차는 노릇이다.

한데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던 그녀는 3가지 조건을 걸다가 할인까지 해주며 협업을 승낙한다. 어차피 혼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으니 파트너가 필요하던 참이라 한아 역시 실용주의로 전환한 걸까? 며칠 앞으로 다가온 워크숍 강평을 앞두고 통 진도가 안 나던 송철의 시나리오부터 개조하기로 한다. 둘은 계속 붙어 다니며 갑론을박을 거듭한다. 남성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는 여자 vs. 요상한 복수극에만 몰두하는 남자의 동업은 순탄할까?

물론 그렇진 못하다. 애초 송철의 의도가 불순한 데다, 어설픈 마초남 행세하는 족족 상대에게 질타당할 뿐. 점점 한아는 그의 기묘한 집착에 의문을 품고 송철 역시 무슨 한 맺힌 게 있나 집요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마침내 입을 연 송철에게 자신과 같은 상대에게 상처를 받은 과거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때 한아가 홀연히 사라진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으려는 송철의 집요한 노력이 이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재회한다. 과거에 발목 단단히 잡힌 그들은 다른 인생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어야 하기에 뜻을 합친다. 각자 품던 영화를 향한 열망이 질곡이 된 현재, 이를 떨치기 위해서라도 둘은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마치 씻김굿을 벌이듯 두 사람은 그들을 도탄에 빠트린 '탁' 감독의 만행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한다. 힘을 합쳐 행방을 수소문하며 영화가 완성되면 지긋지긋한 속박에서 탈출할 수 있길 기대한다.

쉬쉬하던 영화계의 어둠과 정면승부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필름초이스

<지구 최후의 여자>는 역설적으로 작중 송철이 지긋지긋한 한국 독립영화 관행에 대해 열을 올려 비판하는 범위 안에 해당 작품 역시 풍덩 빠져들어 있다. 어찌 보면 자전적인 내용이다. 영화 안에서 제작진 위주로 자신들의 소요에 입각해 대중은 후속 순위로 미뤄둔 채 영화를 만드는 분투기가 중심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처음엔 전혀 다른 영화관을 가진 듯 보이던 구한아 & 송철은 실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던 것.

이야기의 시작점은 음울하다. 주인공들은 영화를 동경하며 인생을 걸어보려 했으나, 그들이 꿈꾸던 것과 현실은 극명하게 달랐다. 탁 감독은 배우지망생인 한아에겐 선정적인 노출 연기를 주문하고, 연출지망생인 송철은 하인처럼 부리며 제자의 아이디어를 자기 영화에 도용하길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인맥 많고 명성 있던 감독은 예술가로 명성을 드높였으나 부품처럼 이용당한 둘의 울분은 출구를 찾지도 사과를 받지도 못했다.

초반에 상극이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 역시 바깥에서 포착하기 힘든 독립영화판 어두운 이면을 성토하면서부터다. 대기업 복합상영관의 기울어진 운동장 아래에서 왜곡된 시장은 신진 작가의 진입을 어렵게 한다. 대중에게 검증 기회를 얻지 못한 독립영화는 공적 지원제도와 영화제 출품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바늘귀' 통과에 비견되는 각종 지원사업, 여기 목매는 창작자가 워낙 많으니 여성영화 가산점에 '불공정'이라며 불필요한 성별 대결이 조장된다.

독립영화계 속사정에 익숙하다면 여러 번 들어봄 직한 내용이다. 오랜 기간 계속된 논쟁에도 해결은 요원하다. 차라리 선악이 무 자르듯 구분되면 좋으련만, 고생 끝에 마침내 찾아낸 탁 감독이 대단한 힘이란 게 없으며 투자자 눈치나 보는 신세였다. 한 번 일그러진 시스템 자체가 후속 세대의 생기를 빨아먹는 괴물로 고착된 상황. 종종 푸념하는 장면은 나와도 거칠게나마 이만큼 직진하는 작업은 드물다.

장르 복합의 향연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필름초이스

영화는 4개의 장으로 분할된다. 1장 '멸종 위기의 사랑' - 2장 '무명의 여자' - 3장 '지구 최후의 영화' - 최종장 '다음 세상'으로 연결되는 구분은 단지 서사 전개로만 활용되는 게 아니라, 마치 장르 오디세이를 펼치듯 다채로운 장르 혼성을 선보인다. 마치 장편 하나에 10개쯤 장르가 입점하는 모양새다. 조금만 삐끗하면 산만함으로 치닫기 딱 좋은 조합이다. 대체 한 편의 영화에서 이런 구성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세어가며 확인할 수밖에.

우선 1장에서 제각기 프리젠테이션하는 한아와 송철의 포트폴리오부터 대비된다. 한아의 <지구 최후의 여자>는 디스토피아 계열 SF 영화다. 세상에 여자가 딱 한 명 살아남은 미래를 배경으로 조잡하지만 그럴싸한 배경이 묘사된다. 송철의 복수극은 철저히 할리우드 풍 액션을 카피한다. 고증이 아주 세련되진 않아 은근 키치로 흐르기도 하지만, 해당 기법이 표상하는 장르 특성과 영화사적 맥락을 떠올리게 만드는 매력을 불러온다. 정교한 시나리오 맥락보다는 관객에게 자유도를 부여하며 상상을 통해 재구성할 여지를 남겨주는 셈이다. 너무 정신없이 장르가 휙휙 바뀌어 혼란하지만, 차츰 활용법을 간파하는 순간 추가되는 재미다.

둘의 협업이 계속되며 조금씩 상호 이해를 위한 밀고 당기기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로맨스와 뮤지컬 장르가 가미된다. 상처를 안고 살던 두 사람의 공감대가 확장되는 전개와 저절로 조응하는 연출이다. 천편일률 연애물과 궤를 달리하려는 시도는 장르 요소 추가로 이어진다. 그런 배합은 둘의 관계가 단순 커플 연애 대신 연대와 우정으로 읽히게 돕는다.

여성 서사라는 큰 줄기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
<지구 최후의 여자> 스틸㈜필름초이스

<지구 최후의 여자>는 전반적인 블랙코미디 기조를 유지한다. 톱니바퀴처럼 빈구석 없이 굴러가진 않아도 마치 태양계 각 행성이 절묘하게 궤도를 형성하듯 각 국면과 장르가 혼돈 속에서도 원심력을 유지하며 흐른다. 점점 둘의 여정이 일체화하면서 확연히 여러 갈래로 형성된 지류는 하나의 줄기로 통합되어 간다. 여성주의 기조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상이 종횡을 이룬다.

구한아와 송철은 탁 감독이란 공통의 대상에게 빚이 있다. 그들은 통속적인 속세의 복수극 대신에 자신들의 공통분모인 '영화'를 온전히 자신들의 손으로 완성하는 방법론을 택한다. 세상에 자신들의 진실을 알리지 못한 채 가슴에 한으로 품고 있어서는 미래로 향할 수도, 지금의 무간지옥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판단. 그들은 감추고픈 자신들의 과거를 과감히 공개하면서 '트로이의 목마'처럼 탁 감독을 끌어들인다. 마침내 둘의 영화가 완성을 눈앞에 둔다.

하지만 여기에서 영화는 독립영화가 쉽사리 감행하지 못하는 파격에 다시금 돌입한다. 다른 차원의 리얼리즘을 획득하고자 블랙코미디와 다크 판타지 요소를 투입한다. 완벽한 복수와 꿈꾸던 자립 직전에 부조리한 국면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느닷없이 종말의 아포칼립스가 도래한다. B급 SF 난장을 통해 세상이 뒤집힐 시간이다. 누구는 그날이 오면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왁자지껄 <지구 최후의 여자>가 펼치는 대혼돈 유니버스에 빠져들다 문득 영화를 탄생케 한 근원이 될 엔진은 무슨 동력으로 굴러갈까 생각이 미칠 테다. 다채로운 장르 융합에 가려진 작품의 배경은 한아가 선연하게 드러내던 본 작품의 '호러' 요소에 답을 숨겨둔 상태다. 주인공의 내면을 투시하듯 표현되는 (영화에서 가장 피범벅 부위일) 몇 개의 장면은 여전히 음지에서 해소되지 못한 문화예술계 성폭력과 권위주의에 희생되는 이들을 위한 진혼굿이다.

영화는 여러 군데에서 불균질을 노출한다. 이로 인해 종종 작중 워크숍 과제물처럼 비칠 구석도 제법 되는 셈. 치밀한 고증 강박 대신 시대상과 공명하며 개입하려는 창작자의 선택과 집중은 확고해 보인다. 평가와 판단은 관객 대중의 몫. 리얼리즘 대신 표현주의로 갈 길을 잡고 용맹히 거친 바다로 향하는 작품의 항해는 어떤 평가를 얻게 될지 궁금하다.

<작품정보>

지구 최후의 여자
The Last Woman on Earth
2025 한국 드라마
2026.07.15. 개봉 85분 15세 관람가
감독 염문경, 이종민
각본 염문경
출연 염문경, 이종민, 윤상화, 박경찬
제작 호랑이연구소
배급 ㈜필름초이스

 <지구 최후의 여자> 포스터
<지구 최후의 여자> 포스터㈜필름초이스


지구최후의여자 염문경 이종민 윤상화 여성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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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