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이 스토리 5>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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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감탄한 대목은 후반부다. 감독은 아날로그 장난감과 전자기기를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는다. 적대 관계로 몰아세워 한쪽을 파괴하는 진부함을 거부한다. 그 거부는 시각 언어로도 작동한다. 보니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순간은 화려하고 따뜻한 색감과 질감으로 채워진다. 장난감들의 세계에는 흙먼지 날리는 실물의 촉감이 있다. 반면 릴리패드의 가상 공간은 매끄럽고 차갑다. 규격화된 디지털 그래픽이 그 세계를 지배한다. 이 시각적 대조가 영화의 핵심 질문을 뒷받침한다. 따뜻함과 차가움, 흙과 픽셀. 그런데 영화는 이 대립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
영화 매체인 '버라이어티'는 이 영화에서 상상력이 펼쳐지는 순간들을 "번쩍이는 형광 색채로 가득 찬 하이 코미디 시퀀스, 아이의 뇌에서 직접 흘러나온 것처럼 전개되는 액션"이라고 묘사했다. 장난감의 세계가 어떤 에너지를 갖는지 짚은 말이다. 그 에너지의 중심에 제시가 있다.
제시가 보니를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를, <토이 스토리 2>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안다. 제시의 전 주인 에밀리. 성장하면서 제시를 잊고 떠나간 소녀. 그 버려짐의 기억이 제시 안에 있다. 릴리패드에게 보니를 빼앗기는 건 에밀리에게 버려졌던 그 시간의 반복이다.
보니와 블레이즈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우디와 버즈, 제시와 릴리패드가 한 팀이 된다. 블레이즈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소녀다. 제시의 아날로그적 임기응변이 릴리패드의 디지털 기술을 통해 블레이즈에게 가 닿는 순간, 경쟁하던 두 세계가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한다. 장난감과 전자기기가 손을 잡고 함께 '플레이'하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제시가 릴리패드와 손을 잡는 것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다. 자신을 버렸던 것들과 닮은 존재를 끌어안으면서 보니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장난감의 가장 오래된 상처가 새로운 협력의 동력이 된다.
전자기기가 설계한 '게임'에 갇혀 있던 아이를, 상상력의 '플레이'로 구출해 낸다. 태블릿 역시 아이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훌륭한 장난감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아이들이 자신과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그 순수한 목적이 기술과 아날로그의 벽을 허문다.
교실에는 아이가 없다
영화 속 장난감과 전자기기가 어울려 노는 세상을 보며 부러움이 밀려왔다. 동시에 서글퍼졌다. 우리의 현실이 겹쳐서다.
한국 사회의 교육 현장에는 '아이들'이 없다. 어른들이 설계한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논쟁이 거세질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교육의 목적이 점점 희미해진다. '게임'의 규칙은 어른들이 정한다. 아이들은 그 판에 끌려 들어갈 뿐이다.
제시는 보니에게 선택받는 것보다 보니가 행복한 걸 택했다. 장난감은 원래 자신이 선택 받아야 존재 이유가 생긴다. 릴리패드와 손을 잡는 순간, 제시는 그 존재 이유를 내려놨다. 보니가 무엇으로 놀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쪽으로.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세대 갈등과 제도적 밥그릇 싸움 속에서 정작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의 정서는 고립되고 있다. 스크린 중독보다 무서운 것은 어른들의 관심 중독과 본질의 상실이다. 릴리패드는 악의가 없었다. 우리의 논쟁이 더 위험하다.
영화의 마지막, 보니와 블레이즈는 함께 장난감을 들고 논다. 그 장면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카메라를 낮추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한국의 교육 논쟁은 항상 어른의 눈높이에서 진행된다. 교권이냐 학생 인권이냐, 매냐 대화냐. 어른들이 어른의 언어로 다투는 동안, 아이들은 그 논쟁의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다. 보호의 대상이지 행복의 주체가 아니다. 앵글을 낮추는 일. 그것이 이 영화가 한국의 어른들에게 보내는 가장 조용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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