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공식예고편
넷플릭스
"몰라. 그딴 년 어떻게 되든 난 내 애가 중요해. 세상 모든 부모가 다 그래."
드라마 속 대표적인 빌런 이지영(박지연)의 대사다. 교사를 아동학대로 고소하며 내뱉는 말이다.
시청자는 분노한다. 그런데 동시에 불편해진다. 저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다. 혹은 자신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경쟁 구조 위에 놓여 있다. 입시, 취업, 부동산, 생존까지 모든 영역이 경쟁이 되면서 공동체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 되는 문화가 깊게 자리 잡았다. 학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파트 층간 소음 분쟁, 노키즈존 논란, 갑질 민원, 지역 갈등까지 수많은 사회적 충돌의 밑바닥에는 비슷한 질문이 있다. "내 가족과 내 권리를 지키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할 때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신뢰는 빠르게 무너진다. <참교육> 속 학부모는 특별한 악인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현실적인 인물에 가깝다. 그리고 교권 붕괴는 그 신뢰의 균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현장 중 하나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수많은 교사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특별한 특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미뤘다. 신고해도 변화가 없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책임지지 않으면,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겪는 경우가 반복된다. 문제는 사회가 만들지만 해결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구조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악인이 존재해서가 아니다. 악인을 제어해야 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껴서다. 분노보다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무력감이다. 법은 작동하고 있지만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 듯한 경험. 무력감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절차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절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수록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강한 해결사를 원하게 된다.
<참교육>이 자극하는 감정 역시 여기서 출발한다. 시청자들은 문제 학생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거나 무책임한 어른들이 제압당하는 장면에서 단순한 복수심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현실에서 해결되지 못한 억울함에 대한 보상 심리이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절차에 대한 누적된 불신이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적 방식마저 정당화하고 싶어질 만큼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경험에 가깝다. <참교육>의 인기는 교육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의 균열을 드러내는 징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서서 복수라도 해줘야죠"
▲참교육공식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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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못 하는 걸 누군가는 나서서 복수라도 해줘야죠"
<참교육> 속 최강석(이성민) 장관의 말이다. 그것은 법과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누적된 불신이 낳은 해결사에 대한 갈망에 가깝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제도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수행한다. 그들은 규정을 우회하고, 때로는 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즉각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조직이지만, 시청자들은 오히려 그 비현실성에 열광한다. 정의를 구현해야 할 제도에 대한 신뢰가 약해서다.
생각해 보면 이미 우리는 수많은 해결사를 만나왔다. <모범택시>의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 <비질란테>의 김지용, <약한영웅>의 연시은, <참교육>의 나화진. 이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등장한다. 법이 멈춘 자리, 제도가 실패한 자리, 정의가 지연된 자리. 장르의 유행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복이다. 사건은 달라도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감정은 비슷하다. 무력감과 불신이다.
그러나 이들이 채우고 있는 공백은 단지 법과 제도의 실패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빈자리에는 책임져야 할 어른들의 부재 역시 놓여 있다. 개인의 균열은 제도의 균열로 이어지고, 제도의 균열은 다시 세대의 균열로 확장된다. 사람들이 해결사를 찾는 이유도 결국 누군가 대신 응징해 주기를 바라서만은 아니다.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졌다고 느껴서다.
흥미로운 것은 <참교육>이 끝난 뒤 현실 정치에서도 교권보호국과 유사한 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허구 속 해결책이 현실의 대안처럼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드라마의 성공을 넘어,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보여주는 신호다. 문제는 제도에 대한 실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해결사를 원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결사를 갈망하는 순간, 그 힘을 견제할 장치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해결사는 언제나 빠르고 강력하다. 그러나 그 힘은 통제받지 않는다. 오늘은 내가 원하는 정의를 실현해 줄 수 있지만 내일은 다른 누군가를 향할 수도 있다. <참교육>이 보여주는 해결사는 사실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신이 만들어낸 상징이다.
"어른이야, 인마. 어른"
▲참교육공식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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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철(이봉준)이 "니들이 뭔데! 예수야, 부처야, 뭐야!"라고 울부짖는다. 나화진(김무열)이 "어른이야, 인마. 어른"이라고 답한다.
이 장면이 <참교육>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유는 단순한 응징의 쾌감 때문이 아니다. 그 말이 너무 오랫동안 부재해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전문가도 많고 제도도 많다. 매뉴얼도 규정도 넘친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서 누가 책임지는가?" 어쩌면 <참교육>의 진짜 주인공은 나화진이 아니라 '부재한 어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토록 해결사를 원하는 이유도 결국 같다. 누군가 책임지고 옳고 그름을 말해주기를 바란다.
생각해 보면 <참교육>이 보여주는 해결사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초인도 아니고 절대 권력을 가진 심판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어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화진에게 열광하면서도 동시에 씁쓸해진다. 현실에는 그런 어른을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다.
법도 있고 절차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정의를 체감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제도보다 영웅을 먼저 찾는다. 해결사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는 영웅이 많은 사회가 아니다. 누군가 대신 응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누군가 대신 복수해 주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리고 누군가 "어른이야"라고 외치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더 강한 나화진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나화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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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등장한 '해결사', 열광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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