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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 캐스팅이 단 돈 10만원? 홍상수니까 가능한 영화

[김성호의 씨네만세 1369] 홍상수 전작전 <첩첩산중>

26.06.15 09:50최종업데이트26.06.1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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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는 말 그대로 영화의 축제다. 흔히 영화팬들이 창작자의 신작을 만나는 축제란 뜻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그저 그뿐 만은 아니다. 현업에 바쁜 감독과 스태프 등 창작자, 또 제작자며 상영 관계자, 평자와 기자들이 한 자리서 교류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고, 무엇보다 마켓을 통해 제 작품을 배급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한다. 영화제가 아니라면 결코 만날 리 없었던 만남이 있고, 때로는 그 만남이 귀한 무엇을 빚고는 한다.

어떤 영화제는 이 같은 기회를 그저 흘려보내길 원치 않는다. 영화제가 중심이 되어 만남을 더 나은 무엇으로 빚으려 한다. 때로는 영화제의 가장 귀한 무기, 즉 영화를 통해서 이 같은 시도가 이뤄진다.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첩첩산중>도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말하자면 영화제가 만드는 영화가 있다. 앞서 소개한 베니스영화제의 특별 프로젝트 결과물인 <50:50>에서 그러하듯, <첩첩산중>도 영화제의 요청에 따른 결과물이다. 이번엔 한국, 전주국제영화제다. 2000년부터 '우리에게 비전을 주는, 미래 영화의 예고편'을 만들어 보여주겠다는 결의 아래 진행해온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로, 세 편의 단편을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로 묶어낸다. 당시로선 혁신이던 디지털 기술을 도구로 영화미학의 지평을 넓히려 한 창작자 3명이 매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선택에 화답한다. 2009년엔 홍상수가 그중 하나가 됐다. 2000년 문을 연 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오! 수정>의 감독이기도 했던 홍상수의 귀환이란 점에서도 주목 받았다.

첩첩산중 스틸컷
첩첩산중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한 홍상수 영화

<어떤방문 : 디지털삼인삼색2009>이란 이름으로 완성된 장편에서 홍상수가 감독한 단편 '첩첩산중'이 들었다. 다른 두 편은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와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다. 세 편 모두 낙후된 지역에 누군가가 찾아오며 시작되는 이야기란 공통점을 가졌는데, 이중 홍상수의 영화는 영화제가 둥지를 틀고 있는 도시 전주를 배경으로 삼았다. 멀리 서울에서 전주를 찾은 미숙(정유미 분)이 오랜 지인들과 만나며 벌어지는 이틀 간의 이야기다. 세 편이 묶여 상영될 당시에도 유달리 홍상수 감독 작품의 인기가 높았단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해 다른 두 편의 작품이 영화제가 내준 숙제를 근근이 풀어낸 졸작이었음을 고려하면 홍상수의 작업이 얼마만큼 다행한 일이었는지. 오로지 '첩첩산중'이 있어 2009년의 전주가 체면치레 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무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가 지난달부터 이어오고 있는 홍상수 전작전에서 <첩첩산중>이 상영됐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따로 볼 자리를 얻기 어려운 작품인 만큼,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제 더는 스크린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배우 이선균의 출연작이란 점에서도 그랬겠지만 말이다.

<첩첩산중>은 홍상수 필모그래피 전체에 걸쳐 <리스트> <50:50> 등과 함께 몇 되지 않는 단편, 그중에서도 첫 번째 단편영화다. 동시에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절묘하게 드러내는, 또 그의 영화 가운데서도 드물게 재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이듬해 이 영화의 세계관을 확장한 <옥희의 영화>로 제6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폐막작으로 초청됐다. 오리종티는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처럼 독자적 경향을 가진 작품을 모아 상영하는 섹션이다.

첩첩산중 스틸컷
첩첩산중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불유쾌한 유쾌함, 홍상수적 영화

영화는 미숙이 새로 생긴, 겉모습은 오래된 중고차긴 하지만, 무튼 애마를 직접 운전해 전주로 가며 시작한다. 명목상 방문의 이유는 전주에 있는 절친 진영언니(김진경 분)를 만나기 위해서다. 도착해 만난 진영언니는 영 불편한 기색이다. 이유인즉슨 엄마와 크게 다툰 탓에 미숙을 제 집에 들일 수가 없겠다는 것. 제 탓만은 아닌 것이 미숙이 전주에 거의 다 와서야 제가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고.

미숙의 속내는 다른 데 있다. 진영언니를 만난다는 핑계로 전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옛 은사 전상옥(문성근 분)에게 전화를 넣는 것이다. 통화하는 본새를 들어보니 미숙은 상옥과 연애까지 했던 사이인 모양인데, 미숙이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둘은 재회하고 깊이 사랑한 옛 연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지난 시절의 뜨거움을 일순 회복하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 익숙한 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으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그리움이며 추억, 사랑의 되새김질 같은 작품은 물론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미숙과 상옥의 만남은 졸지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전화기를 붙들고 통곡하는 '미친년' 같은 젊은 여자와 수화기 너머로 면피를 위한 호통을 치는 찌질하고 늙은 남자의 대비로 귀결된다. 불타올랐던 두 남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못볼 꼴을 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앞서 적었듯 단 이틀의 이야기지 않은가.

첩첩산중 스틸컷
첩첩산중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산 넘어 산, 과연 제목값 한다

<첩첩산중>은 '제목값'하는 영화다. '첩첩산중'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 계속되는 갑갑하고 고립된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 아닌가. 영화 속 이어지는 상황이 꼭 그러하다. 소설가인 교수가 제 제자인 어린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이 교수가 건든 것이 그저 미숙만은 아닌 모양이다. 미숙 말고도 다른 여자들과 비슷한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그 여자 중 하나가 글쎄 미숙과 가장 친한 이다.

그렇다고 그 만남이 문제라고 할 것인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다들 성인인데 말이다. 심지어 이 소설가가 멋지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다. 성공한 소설가에 멋진 선생님이란 후광이 그대로 남성적 매력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실제 현실에서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매력이 동년배에겐 적용되지 않는단 건 또 재미진 부분이다. 상옥에게 까이고 홧김에 부른 대학동기 명우(이선균 분)는 소설가로 등단해 상까지 받았는데도 도리어 미숙에겐 분노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 미숙 자신이 소설을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하는 지망생이기 때문이다. 명우는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앞질러 이룬 이일 뿐, 동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미숙에겐 제가 이미 구축한 동경의 대상이 필요할 뿐, 제 실패를 절감하게 할 우월한 경쟁자가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첩첩산중>이 빚는 사건의 중첩과 연쇄가 흥미롭다. 교수와 제자, 애인과 옛 애인의 사이로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마침내 피할 수 없는 만남으로 귀결된다.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어쩌면 제 전체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폭발력 있는 팬(선풍기 대가리 돌 듯이 횡으로 움직이는 촬영) 전환을 보여주는데, 이선균과 정유미가 빚는 그 장면의 파괴력은 극장 안에 든 모든 이를 좋은 의미에서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하다.

홍상수 전작전 포스터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소설가 은희경이 홍상수 영화에?

따지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엔 드물게 극적이고 폭발력 있다. 물론 구조와 반복, 중첩과 관찰을 통해 삶 가운데 실재하는 어떤 생각을 관객으로 하여금 떠올리도록 하는 홍상수적 효과 또한 분명히 갖췄다. 늙고 젊음, 성공과 실패, 예쁘고 예쁘지 않음의 대비가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모양이 과연 우리네 삶 속의 것과 비슷하다. 홍상수의 영화적 재현이 곧 현실과 닿아 있음이 그렇게 확인된다.

영화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적잖다. 걸출한 소설 <새의 선물>의 작가 은희경이 영화에 깜짝 출연하는 게 대표적이다. 극중 미숙이 존경한다며 무작정 집 앞으로 갔다가 만나는 소설가로 은희경이 출연하는데,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등장이다. 영화제 심사 등으로 영화계 관계자와 소설가가 인연을 맺기도 한다지만 직접 영화에 출연하는 모습이 흔한 것은 아니라 새로운 감상을 자아낸다.

또 하나는 출연료다. 배우 출연료 적기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서도 적은 비용을 들인 작품인데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 등을 캐스팅하는 데 각 10만 원이 고작이었다고. 영화제 측에서 단편영화치곤 적지 않은 제작비 5000만 원을 지원했다는데 이토록 적은 출연료를 지급한 건 홍상수가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들 배우들이 펼친 열연을 떠올리면 과연 영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 성공과 권위가 가진 힘은 대단한 것이다. 작품 안에서든, 밖에서든. 이렇게 <첩첩산중>은 진정으로 스스로를 완성해낸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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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