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사진
창작집단 싹
〈환상공간〉은 기후위기, 전쟁, 경제난, 팬데믹 이후의 단절감 속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건네고자 만들어졌다. 어린이에게는 상상력을, 어른에게는 잊고 있던 동심을 건네고 싶다는 바람도 그 안에 담겨 있다. 손 대표는 이 작품의 출발점을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했다. 창작집단 싹이 결성된 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사회 전체가 깊은 애도에 잠겼고, 축제와 공연도 줄줄이 멈췄다. 손 대표 역시 예술활동을 잠시 멈췄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그는 질문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2020년 코로나19를 지나며 다시 구체적인 형태를 얻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했고, 예술 역시 관객과 직접 만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하지만 손 대표는 바로 그때 예술이 줄 수 있는 치유와 위로,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꿈과 희망을 떠올렸다. 접촉이 적고, 대사가 없어도 가능하며,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도 공연할 수 있는 장르. 그렇게 인형극이 그의 앞에 놓였다.
단순히 상황에 맞는 형식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박성찬 연출과 함께 인형술, 움직임, 제작 과정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2020년 온라인 박스씨어터 형식의 첫 인형극이 만들어졌고, 이후 그 실험은 2021년 〈환상공간〉으로 확장됐다. 2년간의 연구와 제작, 이후 3년간의 성장 과정을 거쳐 작품은 2025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코리안 시즌에도 참여했다.
손 대표가 〈환상공간〉을 통해 관객에게 주고 싶은 감각은 분명하다. 그는 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이 "마치 목욕탕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일상의 때를 벗기고 자신의 순수한 모습을 발견했으면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으로, 어른들에게는 동심으로 가 닿는 경험이다.
이를 위해 〈환상공간〉은 단순히 '보는 인형극'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은 옴니버스 형식의 넌버벌 오브제 인형극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지고, 말보다 움직임이 앞서며, 설명보다 이미지와 리듬이 먼저 관객을 끌어당긴다. 인형극이지만 인형만 등장하는 공연도 아니다. 배우의 몸, 악사의 라이브 연주, 인형술사의 장난스러운 움직임, 오브제의 변화가 함께 무대를 만든다.
공연은 악사들의 라이브 연주와 인형술사의 익살스러운 움직임으로 시작된다. 인형술사들은 마치 '환상의 요정'처럼 관객 곁으로 다가가고, 유연한 몸짓과 장난으로 극장 안의 공기를 바꾼다. 이들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을 작품 속으로 초대한다. 관객은 더 이상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환상을 함께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명이 어두워지고 인형극이 시작된다. 오브제는 배우의 손과 몸을 통과하며 생명력을 얻는다. 평범한 사물이 하나의 인형이 되고, 인형은 다시 생명체가 된다. 관객은 그 변화의 과정을 바라보며 잠시 일상의 고민을 내려놓는다. 디지털과 미디어가 익숙한 시대에, 손과 몸으로 빚어낸 아날로그적 환상은 오히려 더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물'이다. 에피소드 사이의 전환도 단순한 장면 교체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으로 설계됐다. 대형 바다 천이 객석 위로 펼쳐지고, 관객은 머리 위로 출렁이는 천을 바라보며 마치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경험한다. 물은 장면을 잇는 장치이자, 관객의 마음을 씻어내는 상징처럼 흐른다.
세 개의 에피소드, 세 가지 위로
▲공연 장면
창작집단 싹
〈환상공간〉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무너미 마을의 전설'은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신비로운 도사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의 몸짓이 중요한 축을 이룬다. 여기에 이국적인 악기들의 라이브 연주가 더해지며 인형과 배우의 움직임은 더욱 도드라진다. 관객은 시각과 청각이 함께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 '무인도의 두 남자'는 손 대표가 "완전히 성인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 장면이다. 무인도에 갇힌 두 남자는 탈출을 꿈꾸지만, 동시에 개인의 욕심과 마주한다. 우정과 욕망이라는 인간의 본능이 코믹하게 펼쳐지고, 아이들에게는 바보스럽고 재미난 소동으로, 어른들에게는 묘하게 공감되는 풍자로 다가간다. 손 대표는 이 장면을 두고 두 남자가 마치 '덤 앤 더머'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세 번째 에피소드 '소녀와 고래'는 작품의 정서적 중심에 가깝다. 손 대표는 이 장면을 〈환상공간〉의 시그니처라고 설명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쓸쓸한 어린 영혼이 고래라는 영혼의 인도자를 만나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다. 직접적으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거나 재현하지 않지만, 작품 안에는 애도와 위로의 마음이 조용히 흐른다.
"어린 영혼들이,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위로 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은 소녀와 고래의 움직임 속에 담긴다. 고래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상처 입은 마음을 태우고 먼 바다로 나아가는 존재다. 정교한 인형의 움직임은 대사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더 깊이 관객에게 다가간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품는 장면이다.
몸으로 익힌 감각이 인형에
▲공연 장면
창작집단 싹
손진영 대표의 이력도 〈환상공간〉의 독특한 리듬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그는 배우이자 기획자이고, 예술강사이며, 파쿠르 코치이자 서커스 퍼포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작가와 연출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한마디로 "공연예술가 손진영"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오래 붙들어온 것은 결국 움직임이다. 말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설명할 수 있고,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 움직임이 먼저 도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마임, 현대무용, 탈춤, 외줄타기, 폴댄스, 차이니즈 폴, 에어리얼 실크, 에어리얼 로프, 파쿠르 등 다양한 움직임과 퍼포먼스를 익혔다. 그 경험은 〈환상공간〉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었다.
인형술사의 몸은 단순히 인형을 조작하는 기능적 몸이 아니다. 인형과 함께 호흡하고, 장면을 열고,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또 하나의 극적 존재다. 손 대표는 배우들 각자의 몸성과 캐릭터를 살리면서도 인형술사라는 존재를 관객에게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움직임을 접목한다고 했다.
물론 배우들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는 웃으며 "함께하는 배우들을 괴롭히며 인형극에서도 이런저런 다양한 움직임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쌓일수록 작품은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배우의 몸이 달라지면 인형의 호흡도 달라지고, 인형의 호흡이 달라지면 관객이 느끼는 환상의 밀도도 달라진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머무는 환상
창작집단 싹이 지향하는 어린이 공연은 아이만을 위한 공연이 아니다. 손 대표는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가족 안에는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다. 아이를 데려온 부모 역시 관객이다. 그래서 〈환상공간〉은 어린이에게 맞추되 유치하지 않고, 어른에게 닿되 어렵지 않은 공연을 고민한다.
그 기준은 드라마와 표현 방식의 균형에 있다. 어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정교하게 만들되, 그것을 설명적인 언어로 풀지 않는다. 대신 인형의 움직임, 인형술사의 몸짓, 오브제의 변화로 표현한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긴다. 어른들은 인형극 안에서 예상보다 깊은 주제와 감정을 발견한다.
해외 관객의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와 호주 애들레이드 프린지 등 글로벌 야외 축제에서 〈환상공간〉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관객들을 만났다. 공연이 끝난 뒤 한 외국인 성인 관객은 눈시울을 붉히며 거대한 고래 오브제의 지느러미를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그는 "지치고 외로웠던 내 영혼이 푸른 바다 속에 잠겨 완벽하게 치유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사 없는 오브제극이 국경을 넘어 위로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손 대표에게도 깊은 전율로 남았다. 말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너의 눈으로 보는 세계
▲왼쪽부터 배우 오윤정, 손진영 연출, 배우 박현선.
손진영 제공
2026 꿈밭시즌의 주제는 '너의 눈으로 보는 세계'다. 손 대표에게 어린이의 눈이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세상 모든 사물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경이로움의 시선"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는 가능성의 시선"이라고도 했다.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나의 굳어진 세계관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사소한 것에 깊이 공감하고, 익숙한 풍경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일이다.
〈환상공간〉이 관객에게 건네려는 것도 바로 그 시선이다. 손 대표는 관객들이 공연을 본 뒤 극장 문을 나설 때, 늘 마주하던 도시의 아스팔트와 빌딩 숲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곳이 거대한 고래가 유영하고 노란 나비가 날아오르는 푸른 바다일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는 관객들이 "조금은 말랑말랑하고 다정한 시선"을 품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환상공간〉이 아르코 어린이청소년을위한예술지원사업과 아르코꿈밭극장을 통해 관객을 만나게 된 의미도 크다. 손 대표는 아르코꿈밭극장을 "대학로 어린이·청소년 공연예술의 역사적인 상징이자 거점"이라고 표현했다. 그 무대에 선다는 것은 창작집단 싹에게 명예롭고 뜻 깊은 이정표다.
이번 지원은 작품을 다시 다듬는 계기도 됐다. 야외 거리극으로 확장해 온 스펙터클한 에너지를 실내 극장의 밀도에 맞게 정교하게 조율하고, 인형과 오브제의 움직임이 더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무대 언어를 가다듬었다. 한 번의 공연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이 더 오래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손 대표가 아르코 꿈밭극장에 기대하는 역할은 분명하다. 제작 지원도, 공연장 운영도, 관객 개발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가 가장 절실하게 꼽은 것은 "지속적인 재공연 기회"와 "관객 개발"이다. 어린이·청소년 공연은 한 번 올리고 끝나는 장르가 아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호흡하면서 계속 자라고 발전해야 한다.
"좋은 작품을 다음 해에도 안정적으로 다시 올릴 수 있는 무대가 창작자에겐 가장 절실합니다. 그래야 공연의 완성도와 깊이가 진짜로 높아지거든요. 마치 하나의 생명과 같습니다."
〈환상공간〉은 그 말처럼 하나의 생명처럼 자라온 작품이다. 2014년의 질문, 2020년의 거리두기, 인형과 오브제에 대한 연구, 국내외 축제에서 만난 관객의 눈물과 웃음이 쌓여 오늘의 무대가 됐다. 그리고 이제 이 작품은 아르코꿈밭극장에서 다시 어린이와 어른을 만난다.
극장이 창작자에게는 작품을 믿고 키워갈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언제 와도 실패하지 않는 다정한 환상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손 대표의 말은 작품의 바람과도 닮아 있다. 〈환상공간〉은 관객에게 거창한 답을 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일상의 때를 벗기고, 사물에 생명이 깃드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당신의 눈에는 이 세계가 어떻게 보이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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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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