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내부 모습
이규승
초반의 안내방송은 차갑고 규칙적이다.
"경로는 이미 설정되어 있습니다." "모험이나 우회 경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경로 이탈은 없습니다."
열차는 정해진 길을 가고, 사람은 표에 적힌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변경은 없고, 이탈은 없다. 그런데 곧 목소리는 그 질서 안에 이상한 생명감을 불어넣는다.
"일부에서는 역을 심장이라 부릅니다. 선로를 혈관이라고도 합니다. 열차를 혈액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본 열차는 심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이 들릴 때, 작품의 세계는 선명하게 열린다. 열차는 더 이상 도시 교통의 기능적 장치가 아니다. 역은 심장이고, 선로는 혈관이며, 열차는 혈액이다. 그리고 그 열차는 스스로 심장을 갖고 있다.
이어지는 말은 관객을 그 생명체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당신의 심장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심장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관객은 열차 바깥에서 열차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순환계 안에 들어온 또 하나의 심장이 된다. 객석 없는 극장이 낯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에서 관객은 관찰자가 아니라 흐름의 일부다.
기술은 볼거리가 아니라 감각의 언어가 된다
〈당신에게 가려구요〉에서 기술은 단순한 효과가 아니다. 조명, 영상, 사운드, 기계 장치, 관객의 위치와 동선, 자율주행 열차의 움직임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의 환경을 만든다. 관객은 기술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낸 리듬 안으로 들어간다.
특히 사운드는 이 작품의 중요한 축이다. 공간 전체를 감싸는 소리는 관객을 현실의 공연장 밖으로 데려간다. 기계음과 진동, 멀리서 들려오는 방송 같은 음성, 알 수 없는 신호음이 겹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때로는 지하철 터널 속에 서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우주선 내부에 갇힌 것 같으며, 때로는 이미 사라진 문명의 기록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김신록 배우의 내레이션은 이 감각적 환경 안에서 작품의 정서를 붙든다. 목소리는 과장되지 않는다. 낮고 섬세하게 스며들며 마지막 운행을 앞둔 열차의 감각과 내면을 전한다. 특히 "당신에게 가려고요"라는 반복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리듬이 된다. 그것은 고백처럼 들리기도 하고, 신호처럼 들리기도 하며, 마지막 운행을 앞둔 존재의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당신을 봅니다. 이제 가까이서."
"당신을 감지합니다. 무게로, 숨으로."
"나는 늦어집니다. 멈추고 싶습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 문장들이 공간 안에 퍼질 때, 열차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다. 관객의 무게와 숨을 감지하는 존재가 된다.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변하고,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존재. 그것은 기계의 운명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처럼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속도 속에 있는가.
객석 없는 극장에서 관객은 자기 자리를 묻는다
현장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관객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모두가 같은 장면을 본 것은 아니었다. 어떤 관객은 벽면의 푸른 점들을 바라봤고, 어떤 관객은 열차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어떤 관객은 천장의 조명과 안개를 올려다봤고, 어떤 관객은 낮은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린 채 소리를 들었다.
그 장면 자체가 이 작품의 형식을 설명해준다. 객석이 없다는 것은 단지 의자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관객에게 하나의 정답 시선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관객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 누구에게는 열차가 중심이고, 누구에게는 빛이 중심이며, 누구에게는 소리가 중심이다. 그래서 관객은 공연을 보는 동시에 자신의 감각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보게 된다.
중반부에 이르러 목소리는 터널을 통과한다고 말한다.
"지금 터널로 들어갑니다. 길고 어두운 터널입니다."
그리고 관객의 몸을 직접 호명한다.
"당신은 조금 움직입니다. 몸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의자에 기대어 있습니다." "움직여도 괜찮습니다."
이 말들은 관객의 행동을 지시하는 동시에 관객의 상태를 읽어낸다. 관객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공연 안에서 얼마나 드러나 있는지를 느낀다.
정지와 도착의 차이를 묻다
작품은 '문명', '경계', '행성'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세 단어는 크고 멀게 느껴지지만, 공연은 그것을 거대한 담론으로만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은 감각에서 시작한다. 작은 열차 하나, 빛나는 창문, 벽을 타고 번지는 푸른 입자, 낮게 울리는 기계음, 관객의 발걸음. 이 작고 구체적인 경험들이 쌓이면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기계, 속도와 멈춤, 죽음과 기억의 문제로 확장된다.
작품 속 열차는 멈춤을 안다. "나는 수많은 멈춤을 보았습니다." "당신들의 멈춤." 여기서 멈춤은 단순한 정차가 아니다. 멈춤은 죽음이고, 지연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밤이다. 목소리는 "주박은 운행을 멈춘 열차가 돌아가지 못한 채 밤을 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주박이라는 철도 용어는 이 작품 안에서 묘한 정서를 얻는다. 멈춘 열차가 밤을 보내는 일. 돌아가지 못한 채 어딘가에 머무는 일. 그것은 사물의 상태이면서 인간의 상태처럼 들린다.
후반부에서 질문은 더욱 직접적으로 들려온다. "기계에도 영혼이 있을까요?" "영혼은 죽는 것에게만 생기는 걸까요?" "끝이 있는 것들에게, 사라질 수 있는 것들에게." 이 문장들은 다소 철학적이지만, 공연 안에서는 관념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미 관객은 작은 열차의 움직임을 보았고, 그 열차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그 열차가 관객의 숨과 무게를 감지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기계의 영혼'이라는 질문은 갑작스럽지 않다.
열차는 "마지막 신호는 늘 정지 신호"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모릅니다. 정지와 도착의 차이를"이라고 덧붙인다. 이 대목은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질문 중 하나다. 정지는 멈춤이고, 도착은 완성인가. 혹은 어떤 도착은 결국 정지에 불과한가. 삶과 죽음, 이동과 멈춤, 기능과 쓸모없어짐의 경계가 이 짧은 문장 안에 겹친다.
작은 열차가 남긴 오래가는 여운
▲작품 공식 포스터
아르코 홈페이지 갈무리
〈당신에게 가려구요〉는 죽음을 앞둔 열차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이 만든 문명, 인간이 타고 이동해온 기계, 인간이 남긴 흔적, 그리고 인간이 잊고 있던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열차는 마지막 운행을 앞두고 인간에게 가까워진다. 그런데 공연을 통과하고 나면 문득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야말로 오래전부터 기계와 문명, 사물과 행성에게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후반부의 목소리는 관객에게 말한다. "당신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직 빛이 남아 있다고, 관객의 자리 안에 작은 빛이 있다고 말한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움직입니다. 지금 이곳에 계셔도 됩니다. 조금 더 머물러도 됩니다." 공연은 끝을 선언하면서도 관객을 바로 내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더 머물러도 된다고 말한다. 그 말 때문에 끝은 닫히지 않고, 잠시 열린 상태로 남는다.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만난 작은 열차는 끝내 어딘가로 향했다. 그것은 마지막 운행이었지만, 동시에 관객을 향한 첫 번째 움직임이기도 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푸른빛 속을 지나온 몸의 기억처럼, 한동안 귓속과 눈앞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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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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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극장에 왔는데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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