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스틸컷
스튜디오 351
필패의 전장에서 싸우며 얻어지는 것
두 번째 챕터는 성철의 일터에서 시작된다. 대학교 동기로 영화감독이 된 정웅(강정웅 분)이 카페를 찾아와 성철과 대화하고, 그의 이야기를 제 시나리오로 써도 되겠는지를 묻는다. 영화 속 시나리오가 영화 속에 중첩될 가능성이 던져지고, 실제로도 얼마쯤은 그러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인>의 이야기는 그저 관객이 마주한 영화에서 그치지 않고, 정웅의 시나리오가 시각화 된 결과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극과 극중극이 명찰을 달지 않고 등장하여 관객이 그를 가려낼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영화와 허구를 가려내려는 시도는 그러나 필패의 결말로 귀결된다. 영화 자체가 극중극과 다를 바 없는 허구이자 관객 입장에선 매한가지의 초면인 때문이다. 서로 포개어져 독특한 무늬를 남기는 두 개의 중첩된 극이 깨끗이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남기는 탓으로, 영화는 <레슨>에서와 마찬가지로 묘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챕터에선 이와 같은 경계를 조금씩 낮추고 심지어는 부수어내기까지 하는 탓으로, 영화 전체가 정돈되지 않은 혼란이 되어 정돈하고픈 욕망을 불러와 지탱하는 듯한 인상까지 남긴다.
서로 닿지 않는 이야기와 닿는 이야기들이 기묘하게 뒤섞인 영화다. 이혼한 성철에겐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은 성철과의 관계를 감추고서 정웅의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말한다. 첫 챕터에서 성철을 바람맞혔던 또 다른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선 어려운 부탁을 한다. 어느 소설가가 신작 발표를 앞두고 오래 사귄 애인에게 차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을 맛보기도 한다. 사실과 상상이 뒤섞인 여러 개의 이야기가 서로 공간을 달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진짜와 가짜, 의미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 짓고 나누도록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가장 확고하게 구분해 낸 관객조차 확신하기 쉽지 않다.
▲이인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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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비슷한 영화들이 지겨워질 때
결국 <이인>을 지탱하는 건 이야기다. 각각의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거듭되는 동안 관객은 마치 세헤라자드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그녀의 목을 벨 수 없게 된 왕과 같은 마음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기다린다. 각 이야기가 가진 불완전성, 즉 완결되지 않은 여백이 도리어 관객을 사로잡는다. <레슨>에선 시간의 축을 뒤틀어 관객을 붙들려 했던 김경래가 이번엔 서사의 층위를 나누어 엇비슷한 효과를 도모한다. 그와 같은 수법의 정교함이며 완결성과는 별개로 적어도 러닝타임 동안만큼은 분명한 효과를 창출해 낸다.
다만 끝내 답에 이를 수 없는 미결의 영화가 갖는 단점 또한 명백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고민하고 헷갈리게 하는 영화적 수법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나면, 그 반대에 선 형식적 작품들과의 비교우위 또한 사라지고 만다. 독자적인 주제의식과 지향이 불분명해 적잖은 관객이 여정에서의 즐거움보다도 길을 잃었다는 인식을 갖게 될 우려도 상당하다. 제각각의 오해가 모두 감상이 될 수 있다면 관객에게서 영화가 완성되도록 예비한 시도는 연출자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형식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이 따를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여긴다.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건 생각만큼 다양하지 않다. 틀에 박힌 기승전결의 선형적 서사, 관습적인 스펙터클과 거의 규범적이라 해도 좋을 클라이맥스를 거쳐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인물의 이야기가 극영화의 절대다수를 이룬다. 과연 이를 영화의 본체라 해도 좋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주조연과 장르만 바꿔가며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확대재생산하고 마치 돼지가 사료를 먹듯 흡입하는 건 아닐까. 그와 같은 문제의식이 고개를 쳐들 때 <이인>과 같은 작품이 별미 같은 역할을 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 정말이지 세상엔 이렇게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영화의 세계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며, 무법자처럼 나아가는 영화만이 갖는 매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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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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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그런 영화들이 지겨울 때, '입맛 싹 도는' 별미 같은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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