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룸> 장면
(주)바이포엠스튜디오, 리바이브콘텐츠(주)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백룸이 특정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클락만의 공간도, 클레어만의 공간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기억을 쌓는다. 행복했던 순간도 있지만, 잊고 싶은 순간도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속 괴이한 존재들 역시 그런 기억들의 형상처럼 보인다. 실제 괴물이라기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불안과 공포가 형태를 얻은 것에 가깝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불안과 공포는 마음 속 깊은 곳에 평생 쌓여있다.
그래서 <백룸>의 공포는 유독 현실적이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괴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놀라게 하지 않는다. 대신 텅 빈 공간과 끝없는 복도, 설명할 수 없는 정적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 속에서 각자는 자신만의 공포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가장 무서운 것은 화면 속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불안일지도 모른다.
마음속 미로를 헤매는 사람들
<백룸>은 단순한 인터넷 괴담의 영화화가 아니다. 영화는 백룸이라는 익숙한 도시괴담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상처, 그리고 현대 사회인들의 불안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공포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기이한 공간에서 탈출하고, 괴생명체를 피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내면과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케인 파슨스 감독의 연출이다. 20살의 젊은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 높은 세계를 구축한다. 특히 백룸 특유의 기괴한 공간은 단순한 세트장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방,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소품들의 배치는 관객을 자연스럽게 영화 속으로 끌어당긴다.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던 감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레나테 레인스베는 점점 현실감각을 잃어가며 혼란에 빠지는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특히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표정 연기는 영화의 몰입감을 크게 끌어올린다. 치웨텔 에지오포 역시 무너져가는 내면을 지닌 인물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이 품고 있는 상처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또한 영화가 공포를 사용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가 괴물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백룸>은 공간 자체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아무도 없는 거대한 공간,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그리고 그 안을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관객을 압박한다. 공포는 눈앞의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물론 모든 관객이 이 작품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영화도 아니고, 빠른 전개로 몰아붙이는 작품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관객이 직접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감정과 기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마치 개개인의 백룸을 탐험하는 경험을 주는 것 같다.
결국 <백룸>이 이야기하는 것은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상처와 불안, 그리고 잊고 싶었던 기억들. 영화는 그 감정들을 기괴한 공간 속에 담아낸다. 그래서 극장을 나선 이후에도 이상하게 그 노란 복도와 텅 빈 방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백룸은 먼 곳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서 저마다의 백룸을 하나씩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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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영화와 시리즈 속 감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단순한 이야기보다, 우리의 삶과 감정을 비추는 거울처럼 바라봅니다.
브런치에 영화 감성 리뷰와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으며,
영화 속 감정을 담은 첫 에세이집 《그럴 때, 나는 그를 떠올렸다》를 출간했습니다.
레빗구미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남긴 감정과 삶의 이야기를 오래 기록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