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라스트맨> 공연 사진
주식회사 네오
외로움을 대하는 사회의 역할
지난 5일 관람한 <더 라스트맨>이 한 청년의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뮤지컬이라는 것을 알고 이전의 음악들을 다시 듣다 보면, 가사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살고 싶다면 달려야 해, 죽기 싫다면 뛰어야 해"라는 노랫말은 좀비로부터 도망치는 생존자의 조언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년의 고백이다.
좀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혼자가 된 생존자든, 사회로부터 고립된 청년이든, 공통적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구석에 있는 인형 하나를 집어들고 이름을 붙여주며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에는 외로움이 반영되어 있다. 인형의 이름은 '존버',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버텨야 한다는 뜻을 담은 오늘날 유행어가 그대로 인형의 이름이 되었다. '존버'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첫 놀랜드가 조난 상황에서의 고독을 버티기 위해 만들어낸 배구공 친구 '윌슨'과 유사하다(실제로 극중에 윌슨을 암시하는 대사가 나온다).
생존자는 '존버'로부터 용기를 얻고 문밖으로 나갈 기회를 엿본다. 문을 여는 시도도 한다. 하지만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지는 못한다. 이때 나는 생각했다. 만약 밖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단절과 고립은 나날이 심화된다. 고립된 개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시 연결되길 망설이는데, 이때 사회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드러나는 것만 보기에도 바쁜 시대, 큰 목소리만 듣기에도 벅찬 시대다.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작은 생존자와 같은 청년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더 라스트맨>의 생존자는 그와는 반대로 우리 사회가 작동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언젠가 생존자는 예쁜 대나무야자 대신 침대맡에서 말라 비틀어진 식물을 관상용으로 책상에 올려놓는다. 파릇한 대나무야자보다 피폐해진 식물에게 더 관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존자는 그 식물에게 자신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그 식물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사회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랐을 것이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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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지금도 반복되는
다시 단절된 생존자는 문을 더 굳게 닫는다. 문도 더 커지고 무거워진다. 이제 문의 "너비는 900m, 높이는 2,100m, 두께는 60m, 무게는 7,500kg"이다(넘버 'The Door 2'). 이 정도 크기의 문은 생존자가 열지도 못하고, 밖에서도 열기 쉽지 않다. 이건 분명 동시대의 문제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에서 생존자는 공연되는 바로 그 날짜를 이야기하고, 무대를 메운 스크린에는 그날의 실제 뉴스가 송출된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 생존자처럼 외로움을 겪는 청년이 있다는, 자명하지만 쉽게 잊혀지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국가데이터처의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중 36.1%(804만 5000가구)를 차지하며 가장 일반적인 가구 유형이 되었다. 이제 고립과 단절, 여기서 비롯되는 외로움은 특정 세대의 것이 아닌 전 세대를 아우르는 현상이 되었다. 이는 비단 한국 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외로움이 강력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장관급 책임자가 외로움을 국가 정책 의제로 다루도록 했다. 그만큼 시급한 사회 현안이라는 방증일 테다.
마침 한국 창작 뮤지컬 <더 라스트맨>이 올해 영국에 진출했다. <벙커 트릴로지> <카포네 트릴로지> 등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한 극작가 제로스 컴튼이 <더 라스트맨>을 영국 사회 현실에 맞게 보완했고, 한국 공연을 연출한 김달중이 영국 공연도 총괄한다. 영국 공연은 런던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에서 6월 6일까지 이어지며, 한국 공연은 8월 9일까지 대학로 링크더스페이스에서 관객과 만난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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