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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디자이너의 이 말, 글태기 빠진 나에게 용기가 됐습니다

MBC 예능 <소라와 진경> 보며 새로운 런웨이에 서 보기로 결심, '초단편 소설 쓰기' 강좌 신청

26.05.26 15:30최종업데이트26.05.2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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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모델 이소라와 홍진경이 런웨이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 <소라와 진경>
1세대 모델 이소라와 홍진경이 런웨이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 <소라와 진경>MBC

우연히 유튜브에서 최근 방영을 시작한 MBC 예능 프로그램 <소라와 진경>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90년대 추억의 모델들이 다시 런웨이에 도전하는 프로그램 정도로 여겼습니다. 스치고 넘길 수도 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시선을 붙잡은 장면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30년 경력의 톱모델들이 한참 어린 후배 앞에서 어깨 움직임, 걸음걸이, 속도 등을 지적받고, 고쳐가며 기초 워킹을 배우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들은 연예계와 패션계를 오가며 30년 넘게 활동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가장 기본인 워킹부터 새롭게 점검받고 있었습니다. 이 방송은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정상의 자리에 서 보았던 베테랑들이 타성을 깨고 다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인생 리부트 이야기였습니다.

이들이 설레고 떨리는 표정으로 런웨이에 서는 모습은 거창한 성공보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자신과의 싸움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낯설고도 치열한 모습을 보면서, 늘 걷던 길에서 방향을 잃고 서성이던 요즘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늘 걷던 길, 익숙함이 준 글태기

2011년부터 블로그를 시작해 브런치에 글을 올렸고, 기사 연재와 출간까지 하며 나름대로 글 쓰는 사람의 궤도를 꾸준히 걸어왔습니다.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주말 내내 카페에 앉아 글만 써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고, 잠들기 전 떠오른 글감 하나 때문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키보드를 두드리던 열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는 즐거움이 아닌 '의무와 마감'이 되었습니다. 원고 청탁이나 연재 요청 등 확실한 보상이 따를 때만 꾸역꾸역 워드 창을 열었습니다. 글을 아예 안 쓴 것은 아니지만, 늘 써오던 글쓰기가 어느새 타성과 관성에 갇혀버렸습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베테랑이 되어야 한다'라는 압박이 생겼고, 늘 비슷한 글만 반복하는 것 같은 괴로움에 빠졌습니다. 여기에 '나이 들어가는 중년의 글을 요즘 세대가 읽어줄까',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AI 시대에 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까지 더해지니, 글 쓰는 시간이 별로 즐겁지 않았습니다. 15년 동안 글쓰기를 멈춘 적은 없지만, 최근에는 글 쓰는 설렘을 잃어버린 채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글이란 게 늘 잘 써질 수 있나요. 저는 1년 동안 안 썼을 때도 있었어요."

언젠가 들었던 한 기자분의 조언입니다. 글 쓰는 일이 직업인 사람조차 이런 일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습니다. 저에게 지금 필요한 건 연차에 맞는 화려하고 완벽한 글쓰기 기술이 아니라, 예전처럼 글을 쓸 때 느끼던 설레던 마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93세 디자이너의 말 "인생 자체가 끝나는 날까지 도전"

 93살의 나이에도 현업에서 활동하는 진태옥 디자이너의 모습
93살의 나이에도 현업에서 활동하는 진태옥 디자이너의 모습MBC

이 프로그램에서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장면은 올해 93세인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의 인터뷰였습니다. 한국 패션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그는 지금도 매일 수영을 하고, 아이돌 음악을 찾아 들으며 새로운 감각을 익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전 앞에 의기소침해진 이소라와 홍진경에게 말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끝나는 날까지 도전이에요."

간결하면서도 참 묵직한 말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주로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익숙하고 조금은 쉬워 보이는 선택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90세가 넘은 거장이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이 나이에 무슨'이라며 스스로 가능성을 가두었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예전에 오마이뉴스에서 읽었던 <내 나이 80세, 벌써 기자 생활 4년차입니다>라는 기사도 떠올랐습니다. 76살의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삶이 변해온 과정을 풀어낸 글입니다. 특히 '글쓰기가 뭐라고 나를 이토록 흥분시킬까'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읽는 내내 그분의 설레는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뛰었습니다.

30년 차 톱모델도, 80세의 시민기자도, 93세의 디자이너도 모두 설렘을 품고 자신만의 런웨이에서 멈추지 않고 걷고 있었습니다.

'소설'이라는 낯선 런웨이, 서툴게 걷기 시작하다

 새로운 글쓰기 영역인, 소설 쓰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글쓰기 영역인, 소설 쓰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MBC

그들의 발걸음에 용기를 얻어, 저 역시 늘 쓰던 익숙한 글의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런웨이에 서보기로 했습니다. 최근 사내 교육 사이트에서 '초단편 소설 쓰기' 강좌를 신청했습니다. 초단편 소설은 원고지 20~30매 사이 분량의 짧은 글입니다.

늘 팩트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사나 에세이만 써왔던 제게, 허구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인물을 만들어내는 소설은 낯설고 새로운 영역입니다. 관련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소설 한 편도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한참 어린 후배 앞에서 워킹부터 다시 배우던 이소라와 홍진경처럼, 저 역시 글쓰기의 출발선에서 잔뜩 긴장한 채 뚝딱거리고 있습니다.

점심시간과 퇴근길에 온라인 강의를 듣고 메모를 하면서 참 오랜만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당장 거창한 결과물이나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고 서툰 문장을 한 줄씩 써 내려가는 그 시간이 즐거울 뿐입니다.

나만의 연습을 마친 후 글쓰기 모임에도 나가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결과보다는 '다시 도전해 보겠다'라는 마음, 실제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었습니다.

<소라와 진경>에서의 도전도, 제가 택한 도전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거창함이 아닙니다. 도전이라는 건 결국 익숙함과 타성에 맞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일 아닐까요. 오래 해온 일의 본질과 설렘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 다시 나 자신을 재정비하는 모든 것이 어쩌면 또 다른 도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소라와 홍진경이 런웨이에 다시 발걸음을 내딛듯, 저 역시 소설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통해 처음 글을 사랑했던 그 마음에 다시 다가서는 중입니다. 반복하는 일상에 조금씩 굳어가던 제게는 시작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반드시 어딘가에서 내려와야 하는 과정을 뜻하진 않을 것입니다. 내가 좋아했던 일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고, 낯선 영역에서 다시 배우고 도전하면서 설레는 시간을 자꾸자꾸 늘려가는 것. 끝없는 도전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쉽게 늙지 않게 하는 마법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멋진 소설책을 내겠다는 대단한 목표는 없습니다. 그저 이 설레는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처럼 다시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글에 대한 조급함을 조금은 내려놓아야겠습니다. 대신 예전처럼 좋아하는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좋은 글을 읽다가 마음이 움직이면 메모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글을 완벽하게 잘 쓰는 베테랑보다, 서툴더라도 익숙함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요즘입니다.
소라와진경 파리런웨이 도전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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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직장인,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아빠, 매 순간을 글로 즐기는 기록자. 글 속에 나를 담아 내면을 가꾸는 어쩌다 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