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4강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내고향여자축구단이 17일 경기도 수원시 한 호텔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 많은 시민이 이렇게 말한다. '통일은 내 세대에서 물 건너갔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평화적 관계와 경제 협력은 좀 하고 살자.' 이 말은 체념처럼 들리지만, 나는 오히려 현실적인 평화론이라고 본다. 거창한 통일 구호가 설득력을 잃은 시대에도, 전쟁을 피하고 일상의 안전을 지키자는 요구는 더 절실해졌다. 평화는 낭만이 아니라 생활비이고, 보험료이고, 아이들이 불안 없이 학교에 가는 조건이다.
안전사회는 군사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물론 군사적 억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억제만으로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우발적 충돌을 낮추지도 못한다. 하드웨어가 방어벽이라면 '스포츠와 문화는 경보장치이자 우회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표정과 말투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접촉면이 남아 있어야 위기가 커지기 전에 멈출 수 있다. 이것이 '한반도 안전혁명'의 출발점이다.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제도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정부가 민간 응원단 활동에 남북협력기금 3억 원을 지원한 것도 논란 없이 지나가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혈세라고 말할 것이다. 그 비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것은 기록과 평가다.
얼마를 썼고, 무엇을 얻었고, 어떤 위험을 줄였는지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스포츠교류가 정권의 이벤트가 아니라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미래리스크 관리의 제도로 남는다. 제도전환 없이는 다음이 없다
이번 방남을 문화외교로 이어가려면 다음 단계가 분명해야 한다. 먼저 스포츠교류를 경기 개최 여부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남북 선수단이 국제 대회에서 마주칠 때 적용할 방문 승인 절차, 신변 보호, 언론 취재, 응원 수칙, 돌발 시 대응 기준을 미리 정리해야 한다. 매번 정치적 바람을 보고 새로 만들면 신뢰는 쌓이지 않는다.
둘째, 체육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사진전, 기록전, 청소년 스포츠 아카데미, 공동 해설 콘텐츠처럼 정치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은 프로그램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남북이 함께 무대에 서는 대형 행사를 당장 만들자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적으로만 상상하지 않게 만드는 작은 장면을 꾸준히 쌓자는 뜻이다.
셋째,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역할을 나눠야 한다. 수원은 이번 경기의 배경이 아니라 실험의 현장이다. 경기장 관리, 숙소, 교통, 자원봉사, 안전요원, 지역 언론의 취재 방식까지 모두 하나의 도시 외교 경험으로 남는다. 이 경험을 문서로 남기고, 다음 국제대회에 활용해야 한다. 그런 축적이 바로 제도전환이고, 도시의 품격을 키우는 소프트파워다.
스포츠가 공공외교가 되는 순간
북한 관영매체가 이번 방남 소식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북측이 이 경기를 남북교류의 부활로 읽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뜻일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과장된 환영도, 적대적 조롱도 모두 일을 망친다.
필요한 것은 차분한 환대와 정확한 관리다. 선수들이 안전하게 뛰고, 관중이 품위 있게 응원하고, 경기가 끝난 뒤 모두 무사히 돌아가는 것. 지금 한반도에서는 이 평범한 성공이 가장 설득력 있는 공공외교다.
5월 20일 수원종합운동장의 조명이 꺼진 뒤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그날의 사진 몇 장만 남길 것인가. 아니면 방문 승인 절차, 공동응원 경험, 안전관리 매뉴얼, 문화교류 아이디어, 다음 대회를 위한 연락망까지 남길 것인가.
스포츠 행사는 끝나도 도시는 기억을 남길 수 있다. 그 기록이 쌓이면 행정 역량이 되고, 시민의 태도가 되고,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신뢰가 된다. 안전혁명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런 작은 절차의 축적에서 시작된다.
남북 스포츠교류가 문화외교로 이어지길 바란다. 통일을 당장 말하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서로를 관리 가능한 관계로 되돌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한다. 수원의 휘슬이 그 첫 장면이 될 수 있다. 평화는 멀리서 오는 선언이 아니다. 때로는 공 하나가 구르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상대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순간 시작된다. 그 조용한 장면이야말로 한반도가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소프트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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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로 있으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주된 관심분야는 글로벌 위기관리 및 재난·안전학, 일본의 정치경제,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제기구론, 국경학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