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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휘슬이 평화의 신호탄이 되려면

[주장] 8년 만의 북한 선수단 방남, 경기 이후가 더 중요하다

26.05.18 09:54최종업데이트26.05.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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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2026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4강전에서 수원FC 위민을 상대하는 내고향여자축구단이 17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2025-2026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4강전에서 수원FC 위민을 상대하는 내고향여자축구단이 17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 선수단이 중국 베이징을 거쳐 남쪽 땅을 밟았다. 선수 27명, 스태프 12명 등 39명이다. 북한 선수단의 방남은 2018년 12월 인천에서 열린 국제탁구연맹 월드투어 그랜드파이널스 이후 약 8년 만이다.

오는 20일 오후 7시, 경기 수원종합운동장에서는 수원FC 위민과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경기가 열린다. 일반 판매분 7087장은 하루도 안 돼 동났다.

여기까지는 이미 보도된 뉴스다. 여기서 다시 묻고 싶은 것은 그다음 단계이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관중석의 박수, 중계 화면의 몇 장면, 선수들의 악수만 남는다면 너무 가볍다. 한반도에서 대화의 선이 거의 끊어진 지금, 이 장면은 단순한 스포츠 일정이 아니다.

작지만 현실적인 미래리스크 관리의 통로다. 수원에서 울릴 휘슬이 일회성 소음으로 사라질지, 아니면 문화외교로 이어지는 안전판이 될지는 우리 쪽의 준비에 달려 있다.

승패보다 더 중요한 장면

경기력만 놓고 보면 내고향여자축구단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두 팀은 지난해 11월 미얀마에서 이미 한 차례 만났고, 그때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수원FC 위민을 3대 0으로 이겼다. 북한 여자축구는 연령별 국제 대회에서 꾸준히 강세를 보였고, 이번 팀에도 국가대표급 자원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니 경기 자체도 충분히 볼 만하다.

그러나 더 큰 관전 포인트는 점수판 바깥에 있다. 이번 경기는 국가대표전이 아니라 클럽 대회다. 국기와 국가 연주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한반도기를 흔드는 방식의 과거형 공동응원도 이번에는 맞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중요하다.

정치의 상징을 조금 덜어낸 자리에서 선수들은 뛰고, 관중은 경기를 본다. 적어도 90분 동안은 상대를 이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공을 다루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남북 관계에서 이런 평범함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1971년 미중 핑퐁외교를 떠올려 보자. 미국 국무부 산하 외교박물관은 미국 탁구 선수단의 중국 방문이 미중 관계 개선과 이후 공식 외교관계 수립의 토대를 마련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를 넓혔다고 설명했다.

물론 탁구공이 혼자서 닉슨의 방중을 만든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기 이후의 후속 조치였다. 경기장 바깥에서 통역, 의전, 교통, 안전, 언론 대응, 재방문 논의가 이어졌고, 그 작은 절차들이 결국 외교의 큰 문을 여는 손잡이가 됐다. 남북 스포츠교류도 마찬가지다. 경기 하나가 평화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잘 설계된 경기 하나는 평화가 들어올 작은 문을 만들 수 있다.

일본의 단절 실패가 말하는 것

반대로 문을 닫는 정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보아야 한다. 일본의 대북정책은 납치 문제, 핵·미사일 문제, 식민지 지배의 역사라는 복잡한 상처 위에 서 있다. 그 상처를 가볍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본 내부에서도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이 제기됐다. 대북 문제를 국내 정치의 분노 관리에만 쓰고, 실제 대화의 실마리는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사히신문 글로브>가 인터뷰한 다나카 히토시 전 외무성 심의관은 '외교에는 상대가 있다'며, 납치 문제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락사무소처럼 상대 권력과 이어지는 실질적 통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일본과 북한의 정상회담은 2004년 이후 열리지 않았고, 2024년에는 북한이 일본과의 어떤 접촉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2026년에도 북일 정상회담 가능성은 다시 낮아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것을 일본만의 잘못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북한의 책임이 크고, 일본 사회의 고통도 실제다. 다만 실패학의 눈으로 보면 한 가지 교훈은 분명하다. 상대를 압박하는 언어만 남고, 상대의 의도를 읽을 통로가 사라지면 위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가 끊기고, 오판의 비용은 커진다.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체육·문화 교류부터 닫아버린 우리의 습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문을 닫으면 당장은 속이 편할 수 있다. 그러나 닫힌 문은 위기를 관리하지 못한다.

통일은 멀어도 교류는 지금이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4강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내고향여자축구단이 17일 경기도 수원시 한 호텔에서 나오고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4강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내고향여자축구단이 17일 경기도 수원시 한 호텔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 많은 시민이 이렇게 말한다. '통일은 내 세대에서 물 건너갔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평화적 관계와 경제 협력은 좀 하고 살자.' 이 말은 체념처럼 들리지만, 나는 오히려 현실적인 평화론이라고 본다. 거창한 통일 구호가 설득력을 잃은 시대에도, 전쟁을 피하고 일상의 안전을 지키자는 요구는 더 절실해졌다. 평화는 낭만이 아니라 생활비이고, 보험료이고, 아이들이 불안 없이 학교에 가는 조건이다.

안전사회는 군사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물론 군사적 억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억제만으로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우발적 충돌을 낮추지도 못한다. 하드웨어가 방어벽이라면 '스포츠와 문화는 경보장치이자 우회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표정과 말투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접촉면이 남아 있어야 위기가 커지기 전에 멈출 수 있다. 이것이 '한반도 안전혁명'의 출발점이다.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제도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정부가 민간 응원단 활동에 남북협력기금 3억 원을 지원한 것도 논란 없이 지나가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혈세라고 말할 것이다. 그 비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것은 기록과 평가다.

얼마를 썼고, 무엇을 얻었고, 어떤 위험을 줄였는지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스포츠교류가 정권의 이벤트가 아니라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미래리스크 관리의 제도로 남는다. 제도전환 없이는 다음이 없다

이번 방남을 문화외교로 이어가려면 다음 단계가 분명해야 한다. 먼저 스포츠교류를 경기 개최 여부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남북 선수단이 국제 대회에서 마주칠 때 적용할 방문 승인 절차, 신변 보호, 언론 취재, 응원 수칙, 돌발 시 대응 기준을 미리 정리해야 한다. 매번 정치적 바람을 보고 새로 만들면 신뢰는 쌓이지 않는다.

둘째, 체육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사진전, 기록전, 청소년 스포츠 아카데미, 공동 해설 콘텐츠처럼 정치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은 프로그램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남북이 함께 무대에 서는 대형 행사를 당장 만들자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적으로만 상상하지 않게 만드는 작은 장면을 꾸준히 쌓자는 뜻이다.

셋째,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역할을 나눠야 한다. 수원은 이번 경기의 배경이 아니라 실험의 현장이다. 경기장 관리, 숙소, 교통, 자원봉사, 안전요원, 지역 언론의 취재 방식까지 모두 하나의 도시 외교 경험으로 남는다. 이 경험을 문서로 남기고, 다음 국제대회에 활용해야 한다. 그런 축적이 바로 제도전환이고, 도시의 품격을 키우는 소프트파워다.

스포츠가 공공외교가 되는 순간

북한 관영매체가 이번 방남 소식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북측이 이 경기를 남북교류의 부활로 읽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뜻일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과장된 환영도, 적대적 조롱도 모두 일을 망친다.

필요한 것은 차분한 환대와 정확한 관리다. 선수들이 안전하게 뛰고, 관중이 품위 있게 응원하고, 경기가 끝난 뒤 모두 무사히 돌아가는 것. 지금 한반도에서는 이 평범한 성공이 가장 설득력 있는 공공외교다.

5월 20일 수원종합운동장의 조명이 꺼진 뒤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그날의 사진 몇 장만 남길 것인가. 아니면 방문 승인 절차, 공동응원 경험, 안전관리 매뉴얼, 문화교류 아이디어, 다음 대회를 위한 연락망까지 남길 것인가.

스포츠 행사는 끝나도 도시는 기억을 남길 수 있다. 그 기록이 쌓이면 행정 역량이 되고, 시민의 태도가 되고,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신뢰가 된다. 안전혁명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런 작은 절차의 축적에서 시작된다.

남북 스포츠교류가 문화외교로 이어지길 바란다. 통일을 당장 말하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서로를 관리 가능한 관계로 되돌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한다. 수원의 휘슬이 그 첫 장면이 될 수 있다. 평화는 멀리서 오는 선언이 아니다. 때로는 공 하나가 구르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상대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순간 시작된다. 그 조용한 장면이야말로 한반도가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소프트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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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 글쓴이 김영근은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학교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 및 '북핵 리스크 관리와 국제안보레짐의 변용', <포스트 제국주의>(공저), <한일관계사 1965-2015. II: 경제>(공저),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편저)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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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로 있으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주된 관심분야는 글로벌 위기관리 및 재난·안전학, 일본의 정치경제,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제기구론, 국경학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