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축의 밤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올해 극영화가 부진했다지만
2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지축의 밤>과 만났다. 비경쟁부문인 코리안시네마 섹션 상영작으로, 올해 한국 영화 경향을 드러내는 장·단편 44편 가운데 한 편으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다큐멘터리가 강세를 보였고 극영화는 다소 부진했다'고 코리안시네마 섹션 출품작에 대해 언급했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2026년 한국엔 여전히 극영화로 관객을 흔들고자 고심하는, 분출에의 욕구며 표현에의 자질을 갖춘 주목할 만한 창작자가 남아 있는 것이다. <잠 못 드는 밤> <한 여름의 판타지아> <달이 지는 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등을 통해 주목받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자리 잡았고, 2023년엔 장강명 베스트셀러를 원작 삼은 <한국이 싫어서>를 연출한 장건재도 그중 하나라 여긴다. 빡빡한 일정에도 이 영화를 택한 이유가 되겠다.
<지축의 밤>은 한국 독립영화 가운데 종종 맞이하는 설정을 가졌다. 그러니까 독립영화판 감독들이 흔히 고르는 소재, 즉 창작하는 이들의 일과 삶을 소재로 삼았단 뜻이다. 영화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지축역 일대를 배경으로 한다. 명색이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서울 지하철 3호선이라고는 하지만 지축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해 있다. 중심과 변경을 나누는 관점에선 동서쪽에 치우친 역사, 그곳에 영화 한 편 찍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작은 어느 연인의 이야기인 듯하다. 도무지 배우로는 보이지 않는 두툼한 차림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가까이 섰다. 주둥이만 좀 더 뽑으면 키스가 될 형국이지만 멜로의 분위기는 전혀 없다. 이들은 영화 현장 스태프들로, 감독의 지시에 따라 얼굴을 이쪽에 두었다가 다시 저쪽으로 옮긴다. 저편엔 실제 배우들도 있다. 이들이 서로 맡은 캐릭터를 이해하는 한편으로, 둘 사이의 합을 맞춰가는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진다.
감독은 좋게 말해 경청할 줄 아는, 나쁘게 보자면 리더십이 영 부족한 이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겠다 하는 배우들의 말에 휘청휘청하는 것이 복원력을 잘못 계산한 화물선을 보는 듯 위태롭다. 장소를 섭외하고 일정을 따지는 이가 있고, 제 마이크 녹음 말고는 별 관심 없는 이도 있다. 이들이 모여 찍어내는 영화가 대충 어느 연인의 위태롭고 매력적인 시작점인 걸 짐작할 뿐이다.
▲지축의 밤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확장, 전환, 그 끝에 기다리는 것
이 영화가 도무지 무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망망대해에 뜬 배가 물표를 보기 전까지 표류하는지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고 있는 건지를 확인하기 어렵듯이, 영화 속 영화를 찍는 상황만 보아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극 중 어느 스태프인지 배우인지가 감독에게 다가와 물었던가. 그가 실제로 어떤 여성과 연애한 걸 토대로 찍은 영화가 아니냐고, 자기 얘기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는 얼버무려 부인하지만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축의 밤>은 어느 순간 이야기를 확장한다. 이번엔 또 다른 촬영팀이다. 감독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고, 당연히 스태프며 배우들도 달라졌다. 같은 날일까. 알 수 없는 일. 어찌 됐든 영화는 전진한다. 아까는 훨씬 젊어 봬는 배우들이 어느 연인의 시작점을 연기했다면, 이번엔 좀 연식이 되는 남녀가 관계의 막바지에 달해 있다. 감독은 전보다는 적극적이고 조금은 더 몰입하여 연출한다. 배우의 감정 또한 격하고 작은 분출이라 할 상황들도 이어진다.
감독은 때마다 유달리 그 배우를, 여자 배우를 챙긴다. 이것이 제 이야기라면 여배우는 곧 자신일 테다. 영화의 출발점이자 찍은 동기이며 제가 잘 아는 마음일 테다. 여지없이 이번에도 감독에게 자기 이야기가 아니냐는 말이 등장한다.
'OO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영화로 복수하는 거 아니냐' 하는 말들이 부인하는 감독의 말을 쉽게 누를 만큼 직접적이다. 받자면, 이 여자 감독의 전 애인은 같은 판에서 일하는 남자 영화인이다. 영화는 이들의 연애, 그중에서도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막바지를 다루고 있다. 감정은 끝났는가, 이들의 관계는 종식되었는가. 그 끝에도 좋고 나쁨이랄 게 있을까.
▲지축의 밤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만나고 헤어짐은 일상다반사인데
피히테가 헤겔 철학을 구조화해 설명한 '정, 반, 합'의 도식이 이 영화의 기본적 얼개와 유사하다. 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가 있고, 이에 대응하며 어쩌면 반박하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가 있다. 두 가짜 영화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담은 <지축의 밤>은 두 촬영팀의 뜻하지 않은 조우를 클라이맥스로 담는다. 두 영화 모두 '눈 오는 지축의 밤'을 위해 이날, 이곳에 촬영을 나왔단 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앞의 감독과 뒤의 감독은 그렇고 그런 사이일까. 아닐까. 둘의 시답잖은(혹은 그런 체 하는) 모습을 보자면 확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가 마주 달려오는 두 지하철의 교차를 잡아내는 장면이다. 저 멀리 철교 위에 이편과 저편에서 달려오던 두 대의 지하철이 겹쳐진다. 둘은 가까워지다가 일순 겹쳐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만난 자는 마침내 헤어진다. 회자정리다. 그러나 두 대는 다시 만나게 될까.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이라면 그렇겠으나 3호선은 아니다. 거자필반은 이뤄지지 않을 테다. 적어도 이번 운행으로는. 그러나 아주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내일, 또 그다음 날이면 두 차량이 교차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회자정리가 그렇게 빨리 이뤄질 수도 있으리라. 알 수 없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만남이란 멋진 일이다. 저 멀리 교차하는 두 대 열차의 모습이 그러하듯, 흔치 않고 귀한 일이다. 각기 다른 작품을 찍는 이 팀과 저 팀의 마주침이 그러하듯이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헤어졌으나 영화로라도 다시 만들고자 하는 그 관계처럼 다시 떠올리고픈 그런 일이다. 어쩌면 만나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것보다 만나고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이리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저 같은 시각 편의점에 들렀을 뿐인 잘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의 마주침이 영화의 끝을 장식할 만큼 의미를 갖는 것일지도.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
나의 지축과 당신의 지축이 서로 만난다면
지축은 지축역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천문학이며 지질학, 물리학에서 흔히 마주하는 지축은 지구의 자전축을 의미한다. 지구를 관통하는 표면 위의 두 지점, 남극점과 북극점을 잇는 선이 지축이 된다. 그러나 천문학과 지질학, 물리학의 범주를 벗어나 이해해 보면 어떨까. 세상, 지구 위의 기준점은 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지축의 기준을 자전이 아닌 우리네 삶으로, 사람을 저마다 제 삶이란 영화의 감독으로 이해하자면 우리가 밟고 선 땅이야말로 제 세계의 축이 된다. 누구나 제 삶의 중심이고, 축이 된다. 모두가 귀해진다. 이처럼 '지축의 밤' 속 '지축'을 이중적 의미로 이해할 때 영화의 매력이 배가된다. 그렇게 이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 한 가지, 서울교통공사의 서울 지하철 3호선 지축역이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단 점도 매력적이다. 서울을 벗어난 지축이 변방처럼 여겨질 수 있겠다. 때로 때때로 우리 삶 가운데도 그런 순간이 오고는 한다. 가끔은 그런 인식이 우리 삶을, 나아가 다른 이의 삶을 초라하게 바라보도록 한다. 지축에서 벗어난 보잘것없는 위치에 선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그곳 또한 지축, 지구는 원에 가까우니. 그런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회자정리 뒤에 거자필반이 붙으면 문장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지혜가 더욱 깊어지는 것처럼.
올해 전주에서 내가 <지축의 밤>과 만났음을 기쁘게 여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공유하기
두 촬영팀의 뜻하지 않은 조우... 전주에서 만난 이 영화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밴드
- e메일
-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