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헤르츠클란> 공연 사진
엠비제트컴퍼니
<데미안>은 어떻게 <헤르츠클란>이 되었나
지난 28일 관람한 <헤르츠클란>의 배경은 20세기 중반으로, 원작 <데미안>이 출간된 해로부터 반세기 정도 흐른 시점이다. <데미안>이 세계대전과 이로 인한 국제적 혼란 속에서 쓰였다면, <헤르츠클란>은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되는 대립을 배경으로 한다. 세계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 상태를 이어가는 냉전 시기, 그 영향으로 독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서독과 소련에 우호적인 동독으로 갈라진 시기다.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헤일리히 신학교'가 연극의 공간적 배경이다. 싱클레어는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 데미안은 이제 막 신학교에 부임한 수습교사다. 원작 소설에서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친구 관계인 것과 다르다. 수습교사 데미안은 신학 교리를 심화해 학습하는 특수반 '캄프'를 조직하고, 싱클레어와 크나우어는 캄프에서 은밀한 수업을 듣는다.
캄프는 신학 교리를 심화 학습한다는 명목으로 운영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역설적이기 그지없다. 신학은 단일한 교리를 전제하지만, 데미안의 수업은 단일한 교리를 거부하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성경을 비틀고, 독일인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반박하고, 이 세상에는 다양한 관념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은 오직 단일한 교리로 세상을 이해할 것을 강요한다. 냉전과 분단은 하나의 지배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상대를 적대시할 것을 명령한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 더 정확히는 '몰이해'가 비극을 낳는다. <데미안>과 <헤르츠클란>이 비극을 막기 위해 역설한 것이 바로 '달리 보는 태도'로, 이는 싱클레어와 크나우어의 개인적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연극 <헤르츠클란> 공연 사진
엠비제트컴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필자는 '여지'라는 말을 좋아한다. 상황에 여지를 남겨두어야 변화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고, 사고에 여지를 남겨두어야 독단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냉전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양극화는 다른 주장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에 발생한다. 상대의 반박에 취약해지지 않기 위해 믿음을 더 공고히 한다. 최근 광장을 오염시킨 음모론과 극우 담론이 극단적인 사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광장의 오염'은 달리 보는 것을 거부한 채 오직 하나의 관념만을 유일한 진리로 숭배하고,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채 거짓 정보로 반박에 대응하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렇기에 <헤르츠클란>으로 반복된 <데미안>의 교훈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다시 전달되어야 한다.
극중에서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자신을 타락시킨 '프란츠 크로머'에게서 비롯된 악몽에 시달린다. 싱클레어에게만 들리는 정체 모를 소리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그 소리와 마주하도록 도와주고, 악몽 같은 소리는 싱클레어 내면의 것이 아닌 외부에서 주어진 상흔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싱클레어는 이를 인식하고 걷어낸 끝에 비로소 자기 내면의 소리(헤르츠클란)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끝나선 안 된다. 외부의 소리는 끊임없이 내면에 끼어들기 때문에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새로운 유형의 분열과 갈등이 벌어지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성숙한 사회를 향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헤르츠클란>은 7월 12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 3관에서 이 이야기를 전한다.
▲연극 <헤르츠클란> 공연 사진
엠비제트컴퍼니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데미안' 각색한 이 연극이 한국 사회에 남긴 교훈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밴드
- e메일
-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