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렘피카> 공연 사진
놀유니버스
렘피카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나
지난 4월 19일 관람한 <렘피카>에서 주인공 렘피카는 끊임없이 좌절한다. 자신을 지켜줄 것 같았던 주변 세계가 무너지고, 관계가 어긋나는 일이 반복된다. 렘피카는 귀족 렘피키의 아내로 러시아에서 안온한 삶을 누리지만, 이내 볼셰비키 혁명으로 남편 렘피키가 투옥되는 사태를 겪는다. 렘피카는 인간성을 짓밟히는 수모를 감당한 끝에 남편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고, 곧 파리로 망명한다.
렘피카 부부는 이전의 관습에서 벗어나 산업사회 파리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겪는다. 훗날 렘피카의 뮤즈이자 연인이 되는 라파엘라를 만나는 것도 이쯤인데, 마침 불행인지 다행인지 부부 관계도 회복된다. 남편 렘피키가 렘피카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선물한다면, 연인 라파엘라는 렘피카에게 예술적 영감을 선사한다. 렘피키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을 라파엘라가 채워주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렘피카는 둘을 향한 사랑 중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했기에,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사랑에 실패하는 역설을 경험한다. 혁명의 격랑을 겪었던 그녀는 곧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세상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랑도 쉽지 않다. 반복되는 좌절은 캔버스 위에 응집된다. 렘피카의 삶을 그려내던 무대는 이제 하나의 캔버스가 되어 렘피카의 그림들을 소환한다.
렘피카가 그림에 남기고자 한 건, 어떤 경우에도 사라져선 안 될 인간성인 듯하다. 인간성이 너무나도 쉽게 말살되는 시대, 특히 렘피카와 그녀가 사랑했던 인물들은 인간성의 말살을 직접 경험한 존재다. 그렇기에 렘피카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그림을 통해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실패한 사랑을 극복하고, 쉽게 바뀌지 않는 세상을 역동적으로 바꾼다.
그래서 렘피카가 떠난 자리에도 그림은 짙게 남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는 스포츠카를 모는 렘피카 자신을 그린 <초록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1929), 1막이 끝난 뒤에는 라파엘라의 관능적인 몸을 담아낸 <아름다운 라파엘라>(1927)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때그때 등장하는 그림들은 렘피카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강조하므로, 막이 내려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그림들을 놓쳐선 안 된다.
▲뮤지컬 <렘피카>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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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버텨낼 수 있었던 힘
렘피카를 둘러싼 세계는 빠르게 변화한다. 20세기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렘피카의 삶을 관통하지만, 오히려 뮤지컬은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른 변화에 맞서 뮤지컬은 렘피카가 멈춰 섰던 순간들을 조명하고, 그때 렘피카와 관계를 맺었던 주변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남편 렘피키, 연인 라파엘라뿐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래주의 예술가 '마리네티',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옹호하는 친구 '수지 솔리도르'가 렘피카 곁을 맴돈다. 마리네티는 근대 기계 문명의 빠른 속도, 기술을 통한 진보를 옹호하는 미래주의 예술 운동에 앞장선 인물로, 극중 전환점이 되는 시기마다 등장해 렘피카와 논쟁을 벌인다. 마리네티가 옹호하는 무한한 질주는 렘피카의 삶을 불안으로 몰아넣은 시대적 특성과 관련 있는데, 렘피카가 지키고자 한 인간성과 대조를 이룬다.
마리네티가 인사이더라면, 수지는 아웃사이더다. 렘피카는 파리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인사이더인 동시에, 동성 연인 라파엘라와 몰래 사랑을 나누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다. 렘피카와 라파엘라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나누는 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을 옹호하는 수지는 아웃사이더들에게 물리적 안식처를 제공하며 친구가 되어준다.
인물들이 지독하게 얽히는 가운데, 언젠가 렘피카는 상대를 가만히 멈춰서 응시한다. 이 시선이 상대를 구했고, 렘피카 자신을 구했다. 무대에 선 렘피카의 눈을 객석에서 응시할 때면 일종의 저항 정신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에 짙게 남은 그녀의 저항 정신은 본래 그녀의 인간적인 눈빛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필자는 생각하곤 한다.
▲뮤지컬 <렘피카>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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