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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아닌 '친구'로서 함께 추는 탱고

[리뷰] <두 교황>

26.04.21 10:49최종업데이트26.04.2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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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라고 하면 그려지는 풍경은 무엇일까? TV 토론회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장면이 쉽게 떠오른다. 정치판에서 흔하게 나오는 살벌한 분위기는 파란색과 빨간색을 상징으로 하는 사상 진영들이 주도하고 이런 광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당연하다. 거의 인류사의 발전에 함께 발맞추며 성장해온 이 두 진영은 역사가 깊은 만큼이나 서로를 향한 앙금도 골이 깊다. 분명 나라를 바르게 이끌려는 바람에서 출발한 사상들일 터인데 현대에 이르러선 서로를 제거하려는 게 목적이 된 모양이다.

각 정당 대변인들이 매체에 나와 언성을 높이는 걸 보고 있노라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우린 이미 이 두 진영 사이의 전투가 제동없이 격화된 결과를 일상 속에서 체감하고 있다. 걸핏하면 나오는 정치인들의 비리 스캔들은 익숙하고 각 정당에서 나온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야당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일은 당연시되는 절차다. 정적을 억류하고 더 나아가 제거하겠다고 갑작스럽게 계엄을 시도하다가 결국 탄핵당한 대통령의 사례도 이제 1년을 막 넘기지 않았던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들긴 커녕 극단적으로 심해지고 있다. 결국 이런 의문이 튀어나온다. 정말, 싸우지 않고는 공존할 순 없는걸까.

<두 교황> 포스터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두 교황> 포스터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넷플릭스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영화 <두 교황>은 조용히 제시한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이자 전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 간의 우정을 다룬다. 가톨릭 교구에서 보수파의 대표였던 베네딕토 16세와 진보파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프란치스코는 각각 라칭거 추기경과 베르골리오 추기경이라고 불렸던 시절부터 종교관의 차이 간극이 컸다.

좀처럼 섞일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은 라칭거가 베르골리오를 콘클라베에서 이기고 교황의 자리에 올라서고 몇 년 뒤, 교황 비서실장의 성추문 스캔들과 교황청이 이를 은폐했다는 논란이 터지고 재회하게 된다. 베르골리오는 추기경 자리를 은퇴하고 평범한 신부로서 여생을 보낼 생각으로 교황을 찾아가나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의 자리에 물러날 결심을 하고 그가 자신을 대신해 교황이 되라는 부탁을 한다. 자신과 정받대의 길을 걸었을 때 결과를 목도하기 위해서. 이 만남은 단순한 권력 이양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시작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이념의 대립을 '대화의 조건'으로 바꾼다.

<두 교황>, 스틸컷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 분)와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 분)
▲<두 교황>, 스틸컷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 분)와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 분)넷플릭스

영화를 감상하면서 가장 크게 다가왔던 요소는 화면 연출이다. 가톨릭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의 날씨를 반영한 듯한 밝고 산뜻한 색감은 두 교황이 서로 교감하고 스며드는 과정을 따뜻하게 감싼다. 이 빛은 단순한 정서 표현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려는 두 인물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두 교황의 과오를 보여주는 연출은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의 고해 시간은 이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하얀 빈 방에 단둘이 앉아있던 두 인간은 그 순간만큼은 교황과 추기경이 아닌, 그저 삶의 회한(悔恨)에 찬 노인 두명이 된다. 베르골리오가 종교의 길에 들어서면서 사랑을 포기한 순간을 회상할 때는 화면이 흑백으로 연출된다. 흑백은 흔히 고전 영화의 상징으로 불린다. 과거의 돌아갈 수 없는 낭만, 종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포기했던 사랑을 쓰라리게 돌이키는 그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 다음, 베르골리오가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치하 독재 정권에 복종했던 시절을 떠올릴 때는 그 동안 밝았던 색감과 정반대의 차가운 톤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런 한(寒)색은 당시의 냉혹했던 현실을 조명한다. 베르골리오가 독재 정권이 끝나고 변방으로 쫓겨나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시기를 지나 현재 시점으로 가까워지면서 화면은 다시 밝아진다. 한 인간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나아가는 과정을 빛이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자세한 묘사는 베르골리오가 지금의 신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긴 대사없이도 감성적이고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반면, 베네딕토 16세의 고해는 다르게 연출된다. 영화는 그의 젊은 시절은 보여주지 않는다. 둘만이 있는 방안 조명은 순간 희미해지며 이 진공관인 것처럼 주변의 소음과 베네딕토 16세의 고백은 웅웅거리는 묵음으로 처리된다. 내용에 담긴 무게는 클로즈업된 그의 말하는 입, 경악하는 베르골리오의 표정으로 전해진다. 짧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죄의 무거움을 전달하는 연출이다. 베르골리오의 과오는 행동하는 양심으로서의 고뇌, 외부적 사건이 중심이라면, 베네딕토 16세의 것은 전통과 원칙을 지키려다 생긴 내부적 균열과 고독이 중심이다. 그의 과거가 생략되고 웅웅거리는 묵음으로 처리된 것은, 그 죄가 개인의 역사를 넘어 거대한 제도, 가톨릭 교회 속에 은폐되어 온 시스템의 무게임을 암시한다.

<두 교황>, 스틸컷 시스티나 성당 장면
▲<두 교황>, 스틸컷시스티나 성당 장면넷플릭스

영화의 영리한 조명 사용이 두 노인이 짊어져야 했던 과업과 과오를 잘 비춘다. 그 둘은 가톨릭 보수와 진보의 상징이 아닌 공통된 무게를 견뎌야했던 종교인으로서 위로를 나눈다. 서로의 고해 신부가 되어주며 용서를 나눈다. 각자의 신념이 모두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며 인정하는 모습은 이념을 초월한 우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보수파인 베네딕토 16세는 진보파인 베르골리오를 교황으로 올려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려고 했다.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존재는 자신과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동의하진 못할 지언정 그 가치만큼은 인정한 것이다. 이런 자신과 정반대의 존재에게 열쇠를 맡기는 용기가 진정한 보수의 품격이자 진보의 시작이었다.

<두 교황>,스틸컷 베네딕토 16세의 피아노 연주와 감상하는 베르골리오
▲<두 교황>,스틸컷베네딕토 16세의 피아노 연주와 감상하는 베르골리오넷플릭스

각자의 존재를 인정만 한다면 통합의 길은 그때 비로소 열린다.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 모두 독실하게 신을 믿고 섬겼다. 피자와 환타를 즐길 수 있고 서로의 음악을 나눌 수 있는 등, 벽을 낮추면 통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흔한 클리셰인 클래식 음악과 전통적 관례를 고수하는 보수파와 대중문화와 격의없는 태도의 진보파 인물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설정은 조금 식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작품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데엔 효과적이다. 두 교황이 같이 피아노 곡을 즐기고 피자와 환타를 먹는 장면, 그리고 둘이 함께 추는 탱고는 이념을 뛰어넘는 교감의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정은 성별, 나이, 국경을 초월한다고들 한다. 보수와 진보같은 사상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사상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이를 따르는 길에는 언제나 실수나 실패가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두 이념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인지 성찰할 수 있는 매개체는 동류가 아니라 상반된 존재다. 이를 인정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할 수 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요할 수 있다. 진보나 보수, 다른 수많은 의견들이 살벌하게 충돌하는 현 세계에선 다소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에 담을 쌓고 살면 위험은 안에 도사리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놓인 다리일지도 모른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이는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의 시작일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두교황 영화 교황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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