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 스틸컷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 분)와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 분)
넷플릭스
영화를 감상하면서 가장 크게 다가왔던 요소는 화면 연출이다. 가톨릭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의 날씨를 반영한 듯한 밝고 산뜻한 색감은 두 교황이 서로 교감하고 스며드는 과정을 따뜻하게 감싼다. 이 빛은 단순한 정서 표현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려는 두 인물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두 교황의 과오를 보여주는 연출은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의 고해 시간은 이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하얀 빈 방에 단둘이 앉아있던 두 인간은 그 순간만큼은 교황과 추기경이 아닌, 그저 삶의 회한(悔恨)에 찬 노인 두명이 된다. 베르골리오가 종교의 길에 들어서면서 사랑을 포기한 순간을 회상할 때는 화면이 흑백으로 연출된다. 흑백은 흔히 고전 영화의 상징으로 불린다. 과거의 돌아갈 수 없는 낭만, 종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포기했던 사랑을 쓰라리게 돌이키는 그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 다음, 베르골리오가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치하 독재 정권에 복종했던 시절을 떠올릴 때는 그 동안 밝았던 색감과 정반대의 차가운 톤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런 한(寒)색은 당시의 냉혹했던 현실을 조명한다. 베르골리오가 독재 정권이 끝나고 변방으로 쫓겨나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시기를 지나 현재 시점으로 가까워지면서 화면은 다시 밝아진다. 한 인간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나아가는 과정을 빛이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자세한 묘사는 베르골리오가 지금의 신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긴 대사없이도 감성적이고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반면, 베네딕토 16세의 고해는 다르게 연출된다. 영화는 그의 젊은 시절은 보여주지 않는다. 둘만이 있는 방안 조명은 순간 희미해지며 이 진공관인 것처럼 주변의 소음과 베네딕토 16세의 고백은 웅웅거리는 묵음으로 처리된다. 내용에 담긴 무게는 클로즈업된 그의 말하는 입, 경악하는 베르골리오의 표정으로 전해진다. 짧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죄의 무거움을 전달하는 연출이다. 베르골리오의 과오는 행동하는 양심으로서의 고뇌, 외부적 사건이 중심이라면, 베네딕토 16세의 것은 전통과 원칙을 지키려다 생긴 내부적 균열과 고독이 중심이다. 그의 과거가 생략되고 웅웅거리는 묵음으로 처리된 것은, 그 죄가 개인의 역사를 넘어 거대한 제도, 가톨릭 교회 속에 은폐되어 온 시스템의 무게임을 암시한다.
▲<두 교황>, 스틸컷시스티나 성당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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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영리한 조명 사용이 두 노인이 짊어져야 했던 과업과 과오를 잘 비춘다. 그 둘은 가톨릭 보수와 진보의 상징이 아닌 공통된 무게를 견뎌야했던 종교인으로서 위로를 나눈다. 서로의 고해 신부가 되어주며 용서를 나눈다. 각자의 신념이 모두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며 인정하는 모습은 이념을 초월한 우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보수파인 베네딕토 16세는 진보파인 베르골리오를 교황으로 올려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려고 했다.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존재는 자신과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동의하진 못할 지언정 그 가치만큼은 인정한 것이다. 이런 자신과 정반대의 존재에게 열쇠를 맡기는 용기가 진정한 보수의 품격이자 진보의 시작이었다.
▲<두 교황>,스틸컷베네딕토 16세의 피아노 연주와 감상하는 베르골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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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존재를 인정만 한다면 통합의 길은 그때 비로소 열린다.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 모두 독실하게 신을 믿고 섬겼다. 피자와 환타를 즐길 수 있고 서로의 음악을 나눌 수 있는 등, 벽을 낮추면 통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흔한 클리셰인 클래식 음악과 전통적 관례를 고수하는 보수파와 대중문화와 격의없는 태도의 진보파 인물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설정은 조금 식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작품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데엔 효과적이다. 두 교황이 같이 피아노 곡을 즐기고 피자와 환타를 먹는 장면, 그리고 둘이 함께 추는 탱고는 이념을 뛰어넘는 교감의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정은 성별, 나이, 국경을 초월한다고들 한다. 보수와 진보같은 사상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사상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이를 따르는 길에는 언제나 실수나 실패가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두 이념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인지 성찰할 수 있는 매개체는 동류가 아니라 상반된 존재다. 이를 인정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할 수 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요할 수 있다. 진보나 보수, 다른 수많은 의견들이 살벌하게 충돌하는 현 세계에선 다소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에 담을 쌓고 살면 위험은 안에 도사리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놓인 다리일지도 모른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이는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의 시작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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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아닌 '친구'로서 함께 추는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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