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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보이그룹 티켓 꿈꾸지만... 현실은 폭격과 연기·시체 냄새뿐

[리뷰] 극단 김장하는날의 연극 <리브 어 라이브>

26.04.13 16:56최종업데이트26.04.1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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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의 무력충돌과 아슬아슬한 휴전 소식으로 2026년 봄이 혼란스럽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뒤로하여 가자지구와 프랑크푸르트, 미래의 전장을 잇는 <리브 어 라이브(Live-A-Live)>(4월 10일~19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가 대학로에서 더욱 주목 받고 있다. 이 연극은 2026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성화 프로젝트 선정작이다. '전쟁'을 뉴스거리에 머물지 않고 사람의 숨, 몸, 노동, 윤리의식으로 끌어오게 만들었다

최근의 국제 정세는 다시 전쟁 속보로 편안한 잠을 이루기 힘들다. 미국과 이란의 휴전을 깨고 이스라엘의 갑작스러운 충돌에 전 세계는 긴장감이 다시 고조됐다. 멀리 중동에서 시작된 폭음은 이미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까지 건드리고 있다. 이런 때 무대에 오른 연극 <리브 어 라이브>는 더 늦지 않게, 더 아프게 도착한다. 이 작품은 전쟁을 외교 문서나 군사 브리핑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 끝내 놓지 못하는 취향,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욕망,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칫하게 되는 윤리 등으로 전쟁을 다시 쓰고 있다.

지강숙의 〈더 유니버스〉, 윤미희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과의 대화 기록〉, 박지선의 〈진흙새〉를 하나의 무대 위에서 옴니버스로 엮은 〈리브 어 라이브〉는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 상처의 결을 품고 있지만, 끝내 한 질문 앞에 나란히 선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남는가."
"파괴가 지속될 때 인간은 어떻게 남는가."

이 공연의 진짜 힘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장면과 사소한 물건과 흔들리는 마음을 통해 시나브로 밀어붙이는 점이다.

폐허 속에서 콘서트 티켓을 꿈꾸는 마음

 지강숙의 〈더 유니버스〉 공연
지강숙의 〈더 유니버스〉 공연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첫 번째, 〈더 유니버스〉는 전쟁을 비극의 이미지로만 소비하지 않았다. 가자지구의 라나는 폐허 한복판에서도 K팝 보이그룹 '유니버스'의 콘서트 티켓을 꿈꾼다. 폭격과 연기, 시체 냄새와 무너진 학교가 있는 자리에서 콘서트라니 낯설다. 그러나 이 황망한 간극은 작품에서 가장 날카로운 진실이 된다.

라나에게 티켓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신호이고,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죽음이 일상이 된 자리에서 끝끝내 자기 삶의 감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팔천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의 공연장을 상상하는 마음이야말로, 이 인물이 아직 쓰러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강렬한 증거다. 전쟁은 사람의 집과 거리만 부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까지 무너트리는데, 라나는 그 한복판에서 미래를 상상한다. 한강과 콘서트장을, 맛있는 식사와 달콤한 케이크를 비롯해 평범하게 돌아가는 기계들을 떠올린다.

그래서 라나가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 장면은 단순한 팬심이 아니다. 폭발음과 아이돌 음악이 뒤엉키는 무대 위에서 그녀는 쓰러질 때까지 몸을 움직인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저항이다. 끔찍하도록 살고 싶다는 말이 더 이상 문장이 아니라 몸의 떨림이 된다. 그동안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인간의 절망에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그보다 한 발 더 들어간다. 절망 속에서도 끝내 포기되지 않는 사소한 욕망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 언어가 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이 작품이 더 아픈 이유는 라나의 세계를 서울의 택배 물류센터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밤새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서 상자를 분류하는 우미의 삶은 한국 사회의 피로한 노동 현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쉬지 않고 밀려드는 상자, 과로의 기미가 역력한 몸, 생계와 피곤이 뒤엉킨 일상.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너무 익숙하고 평범한 장면이다.

그런데 라나의 눈에 그곳은 전혀 다른 얼굴로 비친다. "나를 죽이지 않는 기계"가 돌아가는 곳.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버거운 야간노동의 현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닿고 싶은 평화의 풍경이 되는 시선의 역전은 참혹하리만큼 정확하다. 우리가 당연한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질서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평화의 증거가 된다는. 그 순간 관객은 자기 삶의 좌표를 다시 묻는다. 전쟁은 멀리 있지만 평화 역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타인의 고통을 기록한다는 것의 불편함

 윤미희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과의 대화 기록〉 공연
윤미희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과의 대화 기록〉 공연한국문화예술위원회

두 번째,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과의 대화 기록〉은 방향을 바꾼다. 여기서 작품이 겨누는 것은 전쟁 자체만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집중했다. 한국인 준은 우크라이나인 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는 악의적인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잘 이해하고, 기록하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그 선의가 가진 균열을 놓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상처를 기록하는 일은 증언일까, 채집일까. 아니면 공감일까, 이용일까. 이해하려는 마음과 타인의 비극을 자기 서사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욕망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그래서 관객은 이 작품 앞에서 쉽게 좋은 마음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자주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처럼 소비해왔는지, 얼마나 자주 안전한 거리에서 전쟁을 관람해왔는지 돌아본다.

이 대목에서 리는 단순한 피해자의 얼굴로 남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상처가 타인의 언어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소비될 수 있는지를 정확히 감지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감동보다는 불편함을 남긴다. 그것은 곧 윤리의 문제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며 눈물 흘리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참혹함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평화를 말하면서도 난민을 밀어내려는 시선이 겹쳐지면서 작품은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된다. 전쟁에는 반대하지만 전쟁이 밀어낸 사람들까지 품고 싶지는 않은 마음, 타인의 불행에는 연민을 보내지만 그 불행이 내 삶 가까이 오는 것은 거부하는 태도. 이 위선은 낯설지 않다. 유럽만의 문제도 아니다. 작품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묻는다.

"당신이 말하는 평화는 과연 누구의 평화인가."
"당신은 정말 전쟁의 바깥에 서 있다고 믿는가."

기술은 진보했지만 윤리는 어디까지 왔는가

 박지선의 〈진흙새〉
박지선의 〈진흙새〉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세 번째, <진흙새>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오히려 가장 현재적인 공포를 건드린다. AI 무기드론 테오, 그 시신경망을 제공한 인간, 그리고 그것을 기술과 자본의 언어로 관리하려는 권력이 공존한다. 얼핏 보면 첨단기술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이 끝내 파고드는 것은 기술보다 감각의 윤리를 중요시 한다.

얼마나 잘 맞히느냐, 얼마나 정밀하게 겨누느냐, 얼마나 빠르게 제거하느냐. 오늘의 전쟁은 점점 더 효율과 정확성의 언어를 닮아간다. 하지만 〈진흙새(clay pigeon)〉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을 틀어버린다. 인간은 어디까지 자기 눈을 살상의 효율에 넘길 수 있는가. 그리고 언제부터 그 눈은 더는 겨누고 싶지 않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술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관한 질문이다(clay pigeon: 공중에 던져 올리는, 진흙으로 만든 원반 과녁).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테오가 표적을 향해 날아가지 않고 철새 떼를 따라 호수 위를 선회하는 순간이다. 멀리서 보면 드론은 새처럼 보이고, 새와 드론을 구분하지 못한 다른 무기들은 모두를 향해 사격한다. 이 장면은 설명보다 영상과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살상 기계가 명령이 아니라 자유로운 비행을 선택하는 순간, 작품은 기계의 오작동이 아니라 인간 윤리의 실패를 말하기 시작한다. 정교해진 것은 기술이지 윤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정말 살아 있는 것인가?

세 편을 다 보고 나면 〈리브 어 라이브〉라는 제목이 다르게 들린다. 그것은 단지 "살아라"는 명령이 아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망설임, 더는 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의 떨림, 폐허 속에서도 음악을 틀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마지막 생의 충동까지 모두 품은 문장처럼 들린다.

이 작품은 전쟁을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고양이 한 마리, 상자 하나, 음성메시지 하나, 강변의 대화, 새 떼의 움직임 같은 작은 이미지들을 오래 붙든다. 놀랍게도 바로 그런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전쟁을 가장 정확하게 증언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헤드라인과 숫자로 도착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부수는 방식은 너무도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그 구체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막이 내린 뒤에도 무대 밖으로 쉽게 걸어나오기 어렵다.

지금 세계는 다시 미국과 이란의 충돌, 휴전, 재충돌의 가능성 속에서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그런 때 〈리브 어 라이브〉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전쟁은 뉴스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티켓이 되고, 택배 상자가 되고, 증언이 되며, 눈을 빌린 드론이 된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과한 끝에 사람은 끝내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정말 살아 있는가."
연극 리브어라이브 대학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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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 <문화+서울>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에서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