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반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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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은 상상하는 일
물론 이런 해법이 지나치게 낭만적이란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파반느> 역시 이를 모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가령 "모든 사랑은 오해"라는 요한의 대사가 그렇다. "그 사람은 남들과 다르다는 오해. 그 사람은 지금 외로울 거라는 오해. 내가 전부일 거라는 오해. 그리고 영원할 거라는 오해."(요한) 이렇듯 사랑은 주관적 오해라는 취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는 자문자답을 거듭하며 "결국 사랑은 상상하는 일"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 사람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고, 외롭지 않을 수 있고, 그 사람에게 나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사랑 또한 영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나를 던져 그냥 믿어버리는 일. 그럴 때, 꺼진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자신의 빛을 환히 밝힐 수 있다고, 작품은 말한다.
▲영화 <파반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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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반느>엔 증거가 없다
흔히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면 전문가들은 객관적 증거를 가져 오라고 한다.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피해자는 한 번 더 준비된 피해를 감내한다. 그렇게 전체 맥락에서 똑 떼어 마련한 증거를 괴롭힘 피해라는 사실관계의 실에 적절히 꿰면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연이은 피해 경험에 따른 피해자의 무너진 자존감의 회복이나 상처 치유에 법은 무관심한 듯하다. 피해자라는 위치성에 매몰되는 것도 문제다.
<파반느>가 제시하는 사랑의 점등에는 그 어떤 보증이나 증거도 없다. 외려 원작 소설에 따르면 '손해'가 있을 뿐.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있어." 그럼에도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는 "결국 영화는 사랑 영화지"란 요한의 대사처럼, 우리 인생의 유일한 열쇠가 바로 사랑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파반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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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노동자의 산재와 해고 사건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매일노동뉴스'에 드라마와 영화를 노동의 관점에서 리뷰한 [조영훈의 미디어×노동]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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